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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은 북소리 – 사라진 장날의 흥정과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때 마을의 중심이었던 장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곳엔 사람들의 웃음소리, 북소리, 장꾼들의 흥정이 어우러진 공동체의 맥박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 북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글은 사라진 장날 풍경 속에 담긴 사람들의 정과 기억, 그리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전통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라진 장날이 마을에 주던 설렘 – 북소리와 장터의 시작
옛날 마을 사람들은 사라진 장날이 다가오면 달력을 따로 보지 않아도 몸으로 그때를 알아챘다. 사람들은 논과 밭에서 일하다가도 서로 눈을 맞추며 벌써 장날이 코앞이네라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말 속에는 피곤함보다 설렘이 먼저 배어 있었다. 장날은 지친 일상에 숨을 넣어 주는 특별한 날이었다.
장날 전날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준비가 분주해졌다. 어떤 집은 장에 내다 팔 콩과 팥을 말리고, 어떤 집은 닭을 잡을까 말까를 놓고 식구들과 상의를 했다. 어머니들은 아이의 손때가 묻은 옷을 한 번 더 털어 입히고, 장에 나갈 동전을 작은 보자기에 챙겨 넣었다. 아이들은 그 보자기를 훔쳐보고 싶어 했고, 어른들은 모르는 척 웃으며 보자기를 꿰매어 허리춤 깊숙이 넣었다.
장날 이른 새벽, 마을 길에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도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지게에 짐을 꾸려지고 천천히 언덕을 넘었다. 먼 마을에서 오는 사람들은 전날 밤부터 길을 나서기도 했다. 장터 근처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것은 북소리였다. 북을 치는 사람은 그날만큼은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전령이 되었다. 돌아오지 않은 북소리는 골짜기를 타고 울려 퍼지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장터에 도착한 사람들은 먼저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먼저 차지한 이는 낡은 비닐이나 새끼줄로 경계를 만들고, 그 안에 작은 꿈을 펼쳐 보였다. 그 자리에 놓인 것은 보잘것없는 농산물일 수도 있었지만, 농부에게는 한 해의 수고가 응축된 결실이었다. 사람들은 좌판을 펴면서도 서로의 눈을 보며 인사를 건넸고, 인사는 금세 담소로 이어졌다. 이렇게 장터의 하루는 돌아오지 않은 북소리와 함께 열렸다.
사라진 장날 물건보다 값진 것, ‘사람의 거래’
예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은 북소리 장터를 떠올리면 먼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장터에서 거래를 하던 사람들은 상대를 손님이나 상인이 아닌 이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물건을 늘어놓고도 먼저 요즘 농사 잘돼요? 어르신은 건강하시대요? 같은 안부를 물었다. 말 한마디가 오가는 사이, 마음속에서는 이미 거래가 시작되고 있었다.
많은 농부는 자신이 직접 키운 채소와 곡식을 자식처럼 아꼈다. 사람들은 누군가 그 물건을 집어 들면, 품질을 자랑하기보다는 키우는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봄에 냉해를 맞았지만 끝내 살아남은 모종 이야기, 장마철에 쓰러질까 밤새 지켜본 논두렁 이야기 같은 것들이 좌판 위에 함께 올랐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물건을 샀고, 물건의 값에는 그 사람의 땀과 시간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흥정은 때로 격렬해 보였지만, 속마음에는 상대를 향한 예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상인은 웃으면서도 계산기를 머릿속에서 굴렸고, 손님은 지갑 사정을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제안을 했다. 둘 사이의 줄다리기가 끝나면, 어느 쪽도 크게 이기지 않은 채 적당한 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꼭 다음에 또 와요라는 말이 덧붙었다.
사라진 장날의 장터에서는 돈이 없어도 거래가 이루어졌다. 어떤 사람은 쌀 한 말을 외상으로 가져갔고, 어떤 사람은 다음 장날 갚겠다고 말하며 새 신발을 받아 들었다. 상인은 장부 한 구석에 이름을 적으며 이 사람은 못 갚는 사람이 아니야, 형편이 어려울 뿐이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런 신뢰가 쌓이면서 장터는 한 번뿐인 만남의 공간이 아니라, 관계가 이어지는 정기적인 약속의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관계를 ‘사람의 거래’라고 불렀다.
도시화가 사라진 장날을 밀어낸 이유
세상이 변하면서 장터의 시간도 변했다. 농로가 사라지고 포장도로가 깔리자, 사람들은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버스와 승용차를 타고 큰 도시로 나가게 되었고, 손에는 전통시장 대신 대형마트의 장바구니가 들렸다. 편리함은 사람들의 어깨를 가볍게 했지만, 마을 장날의 자리는 조금씩 좁아졌다.
도시에 들어선 대형마트는 마을 장터가 제공하지 못하던 것을 내세웠다. 실내에서 비를 맞지 않고 쇼핑할 수 있다는 편안함, 넓고 환한 매장, 언제 찾아도 열려 있는 영업시간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가격을 비교하며 카트를 밀었고, 계산대 앞에서는 기계적인 인사와 영수증만이 오갔다. 사람들은 더 싸고 더 다양한 물건을 손에 넣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웃을 이유는 사라졌다.
도시화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까지 바꾸었다. 농사를 짓던 집들은 하나둘 도시로 이주했고, 남은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갔다. 장날을 준비하던 어르신들은 더 이상 새벽길을 걸을 힘이 없다고 했다. 젊은 세대는 장터에서 좌판을 펴기보다 편의점이나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장터 한복판에 서 있던 커다란 플래카드는 바람에 찢겨 나갔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돌아오지 않는 북소리는 장날이 아닌 축제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되었다. 방송 장비가 대신 음악을 틀어주었고, 북은 보여주기 위한 공연용 소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무대 아래에서 잠시 박수를 보냈지만, 그 소리가 마을의 일상을 깨우는 리듬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도시화는 사람들의 삶을 넉넉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장터라는 공동체의 무대를 서서히 밀어냈다.
사라진 장날의 흔적을 좇는 사람들
그래도 사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몇몇 사람들은 텅 빈 시장 골목을 찾아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사람들은 낡은 간판과 녹슨 셔터를 찍으며, 그 안에 남아 있는 기척을 상상했다. 어떤 사람은 장날마다 붐비던 골목 사진을 오래된 흑백 사진첩 속에서 꺼내어, 현재의 풍경과 나란히 놓아 보기도 했다. 사진 속 아이들의 웃음과 현재의 적막한 골목이 한 화면에 담길 때, 사람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잠기곤 했다.
학자와 기록자도 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인들을 인터뷰하며 장터의 기억을 글로 남겼다. 마지막까지 좌판을 지키던 어르신들은 자신이 겪은 흥정과 사건을 천천히 들려주었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돈주머니 이야기로 웃음을 남겼고, 또 어떤 이는 장날마다 만났던 첫사랑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런 이야기들은 공식 기록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지만, 시장이라는 공간에 깃든 삶의 온도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언이 되었다.
한편 일부 마을에서는 작은 장날을 되살리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지역 주민과 예술가가 힘을 합쳐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전통 장날을 열어 보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들은 옛 장터 자리에 다시 좌판을 펴고, 북을 빌려다 장터 한가운데에 세웠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이끌려 모여들었고, 처음 장날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생소한 풍경에 눈을 반짝였다.
이런 자리는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모방에 가까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사라진 장날의 그림자를 보았다. 상인과 손님이 웃으며 흥정을 하는 짧은 순간에,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기묘한 시간을 경험했다.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장터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과 조상들의 삶이 포개진 기억의 무대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전통시장 복원의 의미, 단순한 경제가 아닌 기억의 복원
요즘 곳곳에서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그런 움직임을 단순한 지역 경제 살리기 프로젝트로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시장을 복원한다는 것은 곧 시장이 품고 있던 시간과 사람들의 관계를 복원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간판과 깨끗한 화장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이 예전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그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야 한다. 상인은 손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손님은 자신이 산 물건이 어떤 손을 거쳐 왔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장터에서 오가는 말과 웃음이 다시 쌓일 때, 시장은 비로소 ‘장날의 공간’으로 되돌아온다.
전통시장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은 시장의 역할을 ‘현재의 편리함’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본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부모 세대의 기억을 듣고, 아이들에게 그 기억을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시장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 된다. 물건이 아니라 이야기와 정서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돌아오지 않은 북소리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조금 쓸쓸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동시에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지 않는다. 북을 치는 손이 멈추었을 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리듬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 복원은 그 마음속 리듬을 다시 밖으로 꺼내려는 시도다. 누군가 북을 한 번 더 두드리면,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지 모른다.
마을의 장날은 분명 예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날의 기억을 지금의 삶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 갈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작은 재래시장을 찾는 일, 상인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는 일,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담긴 시간을 잠시 떠올려 보는 일이 바로 그 시작이다. 사람이 다시 사람을 바라볼 때, 장날의 북소리는 조용히 되살아난다. 그 소리는 더 이상 시장 한가운데에서만 울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일상 속 곳곳에서 천천히 퍼져 나가며, 잊혀 가던 공동체의 기억을 깨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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