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동짓날 팥죽 나누기 – 붉은 죽 한 그릇에 담긴 액막이 마음은 붉은색이 가진 상징성과 액막이 신앙이 깊게 담긴 겨울 의례였다. 마을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의 안녕을 기원하던 동지 풍습의 의미를 생생한 생활사 중심으로 되짚는다.

겨울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올리던 붉은 의식
동지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절기였다.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점에서, 자연의 기운이 극도로 음해지는 때라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기를 ‘작은 설’이라 부르며, 한 해의 마지막과 새로운 기운의 시작을 동시에 준비했다. 그런 동짓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것이 바로 붉은 팥죽이었다.
팥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붉은색은 예부터 액운을 물리치고 기운을 바로잡는 색이라고 여겨졌고, 팥죽의 뜨거움은 차가운 겨울 기운을 거스르는 힘을 상징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붉은 죽 한 그릇에 온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오늘날에는 팥죽을 사 먹거나 특별한 날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 농촌에서는 동짓날이 오기 전부터 팥을 씻고 삶아 두며 정성을 준비하는 풍경이 자연스러운 하루였다.
이 글에서는 동짓날 팥죽에 담긴 의례적·역사적 의미, 마을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던 팥죽 나누기 풍경, 그리고 이 풍습이 사라지게 된 이유와 현대적 재해석까지 폭넓게 살펴보고자 한다.
1. 동짓날 풍습의 기원과 붉은색의 상징성
동지는 24절기 중 하나로,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자연의 질서 속에 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을 지나면 서서히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즉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다시 돌아오는 첫날’ 이라는 상징이 있었다. 그래서 동지는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순간이자 동시에 양기가 다시 움트는 출발점이라 여겼다.
그 가운데 팥은 특별한 재료였다. 팥의 붉은색은 악귀가 싫어하는 빛이라고 믿었고, 붉은빛을 집 안에 두면 척(災厄)을 막을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 것뿐 아니라, 집 안 곳곳에 팥죽을 조금씩 뿌리거나 바르는 풍습이 생겨났다.
학자들은 이 풍습을 두고 농경 사회의 주술적 실천이라고도 설명하지만, 실제 농촌에서는 그런 분석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농부들은 겨울철에 곡식창고나 헛간에 팥죽을 뿌리며 쥐나 해충을 막는다는 믿음을 가지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문지방, 장독대 뚜껑, 헛간 기둥에 작은 붉은 자국을 남기며 올해는 무사하라는 마음을 담았다.
붉은색의 힘은 단지 미신으로만 취급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삶 속 깊이 스며 있었다. 특히 겨울이 길고 혹독하던 시절에, 팥죽은 눈에 보이는 형태의 안심(安心)이었다. 붉고 뜨겁고 걸쭉한 그 죽은, 어둠이 머물던 계절을 밀어내는 한 그릇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2. 팥죽을 쑤던 아침부터 나누던 저녁까지 – 하루의 흐름
동짓날 아침, 마을 부엌에서는 연기가 먼저 일었다. 큰 가마솥에는 씻어 둔 팥이 담기고, 불을 피우는 소리와 장작 타는 냄새가 골목에 스며들었다. 어린아이들은 주걱을 들고 솥 뚜껑을 열어보려 들었고, 어머니들은 뜨거운 김이 나오는 것을 경계하며 손을 휘저었다.
팥죽을 끓이는 과정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작은 행사였다. 팥을 삶아 껍질을 벗기고 다시 곱게 으깬 뒤 쌀가루를 풀어 넣어 한 번 더 끓이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갔지만, 그 과정 자체가 정성과 마음을 담는 시간이었다.
팥죽이 완성되면 종지나 사발에 덜어 집안 어른들께 먼저 올렸다. 이어 조상신이나 집안의 수호신에게도 작은 그릇을 바쳤다. 이때 집집이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듯 소박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다음 순서는 이웃과 나누기였다.
아이들은 작은 그릇에 팥죽을 담아 옆집, 윗집, 뒷집으로 뛰어다녔다. 문이 열리면 서로 동지 팥죽 왔습니다! 라고 외쳤고, 받은 집에서는 올해도 무탈하자라는 짧은 덕담을 건넸다. 팥죽 한 그릇이 오가는 이 순간은 마을 전체가 한 마음이 되는 깊은 소통이었다.
동네 어귀에서는 종종 작은 모임이 벌어졌다.
농한기라 여유가 생긴 남정네들은 팥죽 한 사발을 들고 새해에 대한 이야기, 마을의 걱정거리, 농사 전망을 서로 나누었다. 아이들은 옆에서 팥알을 건져 먹으며 장난을 쳤고, 어른들은 이를 웃으며 바라봤다.
이처럼 팥죽은 단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루틴처럼 반복되는 공동체의 재확인 과정이었다.
3. 집 안에 뿌리던 팥죽과 액막이의 실천
팥죽 풍습의 가장 독특한 점은 단지 먹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팥죽을 떠서 문지방에 바르거나, 장독대 뚜껑에 살짝 뿌리거나, 헛간 모퉁이에 한 스푼 떠놓는 행위들은 모두 액운을 막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특히 문지방은 집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로 여겨져, 잡기가 드나들기 쉬운 곳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붉은 팥죽을 문지방에 찍어두면 악귀가 그걸 보고 피해 간다고 설명하곤 했다.
또 어떤 집에서는 팥죽을 조금 퍼서 마당 한가운데 놓고, 이 집을 지키는 존재에게 안부를 전하는 의식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거창한 제사가 아니라, 아주 소박한 생활 속 주술이었다.
농부들은 자연과 집, 사람과 곡식, 해와 달의 흐름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여겼기에, 팥죽 의례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아이들은 이런 풍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중하는 마음’을 배웠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미신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 농촌 사회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심리적 장치로 충분히 기능했다.
4. 팥죽 나누기 풍습이 사라진 이유와 사회 구조 변화
팥죽 풍습이 사라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1) 가족 단위 중심의 변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며 세시풍속이 공동체에서 수행되던 구조가 무너졌다.
예전에는 한 집에서 팥죽을 쑤고 여러 집이 나누던 문화가 있었지만, 가족 단위가 작아지자 자연스럽게 풍습이 줄어들었다.
2) 상징적 행위의 붕괴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나 기운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액막이나 주술적 의례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팥죽 ‘바르기’나 ‘뿌리기’ 같은 세부 풍습은 빠르게 사라졌다.
3) 음식의 변화
식재료와 조리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전통적인 의례 음식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특히 겨울철에도 다양한 보양식과 제철 음식이 공급되면서 ‘동짓날 팥죽’이라는 날적 의미가 약해졌다.
4) 이웃 공동체의 약화
가장 큰 변화는 결국 이웃 관계의 희미함이다.
팥죽을 나누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마음을 내야 하고, 서로를 챙기는 정서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현대 도시는 이웃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 팥죽 풍습이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5. 동짓날 풍습이 전달하던 공동체의 힘과 정서
팥죽 풍습이 전했던 가장 큰 가치는 ‘따뜻한 마음의 순환’이었다.
붉은 죽 한 그릇을 건네는 행위는 단순한 배달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가족에 대한 염려, 이웃에 대한 정, 그리고 마을 전체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 팥죽을 들고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그 행동은 세대 간 소통의 연결고리였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집만 잘 살자는 마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동네’를 경험하게 되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잘 먹고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덕담 속에 담았다.
팥죽 풍습이 전달한 또 하나의 정서는 ‘겨울을 버티는 마음’이었다.
겨울은 농사일이 없는 시기였지만, 동시에 깊은 고독과 고단함이 찾아오는 계절이기도 했다.
팥죽 나누기는 그 추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힘을 모으는 작은 의식이었다.
결론 - 붉은 팥죽에 담긴 마음을 기억하며
동짓날 팥죽 나누기는 사라진 풍습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풍습은 단순히 ‘옛날이 그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집과 집,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팥죽의 붉음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따뜻함의 색이기도 했다.
겨울의 긴 어둠 속에서 한 그릇의 따뜻한 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생각해 주었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동짓날 팥죽을 다시 의무적으로 재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풍습이 담고 있던 ‘서로 챙기는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지금도 충분히 되살릴 수 있다.
작은 음식을 나누거나, 안부를 묻는 문자 한 통을 보내는 것도 동짓날 팥죽의 정신을 이어가는 현대적 형태가 될 수 있다.
과거의 풍습은 사라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이어지는 한, 동짓날의 붉은 팥죽은 잊히지 않는다.
FAQ
Q1. 동짓날에 팥죽을 먹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붉은색이 액운을 막는다는 믿음이 있었고, 겨울 음기를 물리치기 위해 뜨겁고 붉은 팥죽을 먹었다고 전해집니다.
Q2. 팥죽을 이웃에 나누던 풍습은 왜 사라졌나요?
이웃 공동체의 약화, 핵가족화, 생활 방식의 변화 등으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Q3. 지금도 팥죽을 나누는 지역이 있나요?
일부 농촌에서는 전통을 이어가며, 도시에서는 동지 행사나 복지관에서 팥죽을 나누는 사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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