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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햇빛이 얇게 들판을 덮기 시작하면 집 뒤 밭둑에는 다른 계절과는 전혀 다른 색이 올라왔다. 겨울 동안 보이지 않던 초록빛이 땅 가까이에서 천천히 퍼졌고, 낮은 풀들 사이로는 봄 특유의 부드러운 기운이 고르게 스며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작은 잎을 가지런히 펼친 토끼풀이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잎들이 촘촘히 모여 땅을 덮고 있었고, 이 초록빛이 퍼지는 속도만 봐도 봄이 이미 들판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밭둑은 집과 들판의 사이에 놓인 작은 경계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가장 넓은 놀이터였다. 흙이 부드럽게 풀리는 시기에는 밭둑을 걷는 느낌이 한층 다르게 전해졌다. 발끝이 가볍게 파묻히는 촉감과 함께 흙 속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겨울 동안 잊고 있던 자연의 온기를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이런 날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밭둑 주변으로 모였고, 토끼풀을 엮는 놀이는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토끼풀을 엮는 일은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의 움직임 속에 작은 집중과 섬세함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가장 줄기가 질기고 잎이 고운 토끼풀을 먼저 골랐다. 손가락 끝으로 줄기를 따라가며 탄력을 확인하고, 꺾이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줄기를 가진 풀을 하나씩 뽑았다. 바람이 약하게 지나가면 풀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가볍게 들렸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몫을 찾았다.
토끼풀을 엮는 첫 동작은 줄기 아래쪽을 조금 비틀어 고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작은 고리가 생기면 다음 풀의 줄기를 그 안에 끼워 넣어 고리를 이어 나갔다. 이 과정은 단순했지만 손끝에 닿는 풀의 결을 느끼며 천천히 이어가는 시간이 주는 고요함이 있었다. 풀잎에서 묻어 나오는 풋내는 바람과 함께 아이들 주변에 퍼졌고 이 향은 밭둑 전체를 감싸는 봄의 냄새와 자연스럽게 섞였다.
밭둑 위에 앉아 토끼풀을 엮다 보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햇빛은 조금씩 각도를 바꾸며 풀잎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는 엮고 있는 고리 위로 가볍게 드리워졌다. 손끝에 힘을 조금 주면 풀잎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줄기를 이어 붙일 때마다 작은 딸깍거림 같은 감촉이 전해졌다. 아이들은 완성된 고리를 서로에게 보여주었고, 더 긴 고리를 만들기 위해 다시 풀을 모으러 밭둑 아래로 내려갔다.
봄철 토끼풀 엮기 놀이는 단순히 노는 것을 넘어서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풀잎이 햇빛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바람이 지나가면 줄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느 쪽에 풀이 더 많이 자라는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풀잎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곤충들을 발견하기도 했고, 가끔은 네 잎 클로버를 찾겠다며 밭을 더 넓게 돌아다니기도 했다. 네 잎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작은 의미를 가진 탐색이었다.
한참을 엮다 보면 손목이 조금 뻐근해지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곧 다른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토끼풀로 만든 반지는 금세 손가락에 자리를 잡았고, 조금 더 길어진 고리는 팔찌가 되었다. 긴 줄기를 여러 개 이어 만든 큰 고리는 머리 위에 올려 작은 화관처럼 만들기도 했다. 초록빛이 두텁게 모여 있는 그 화관은 햇빛을 받아 더 선명하게 보였고 아이들은 서로에게 씌워주며 웃음을 나누었다.
오후로 접어들며 햇빛이 따뜻하게 내려앉을 때쯤 밭둑의 전체 분위기는 더 아늑해졌다. 들판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초록빛의 잎들은 바람이 잠시 멈추는 동안 아주 가볍게 흔들렸다. 아이들이 앉아 있던 자리 주변에는 벌써 많은 토끼풀이 뽑혀 있었지만 그 빈자리를 금세 다른 풀이 채우고 있었다. 자연은 늘 그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며 계절을 이어가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놀았다.
저녁 기운이 밭둑을 감싸기 시작하면 토끼풀 엮기 놀이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만들어 둔 초록 화관과 팔찌는 아이들의 손에 들린 채 집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했다. 하루 동안 이어진 풀의 촉감, 바람의 흐름, 햇빛의 결은 아이들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 기억은 다음 봄에도 같은 밭둑으로 이끌었다.
토끼풀 엮기 놀이는 특별한 준비도, 큰 소리도 필요 없는 조용한 놀이였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감각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밭둑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은 아이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봄의 풍경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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