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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면
산비탈의 공기는 낮과 저녁이 뚜렷이 갈리는 색을 띠었다.
햇빛이 천천히 낮아지는 오후 무렵이면
산자락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지고
떨어지는 바람 속에는 밤송이의 향이 은근하게 섞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산비탈로 향했고,
밤송이가 떨어진 자리를 찾아
조용히 둘러보며 밤줍기를 시작했다.
밤나무 주변은
낮 동안 햇빛을 듬뿍 받은 뒤
저녁이 가까워지며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낙엽 위로 떨어진 밤송이들은
빛에 반사되어 은근한 윤기를 띠었고
가까이 다가가면
밤송이 사이로 살짝 드러난 알밤이
곳곳에서 작은 숨을 쉬는 듯 보였다.

밤 줍기는 서두르지 않는 놀이였다.
발끝으로 낙엽을 살짝 밀어보면
그 아래 숨어 있던 밤송이가 드러났고
송이를 조심히 돌려가며 벌린 틈 사이로
알밤을 꺼내는 과정은
작지만 특별한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밤송이를 맨손으로 만지면
잔가시가 피부에 닿아 따끔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나뭇가지를 이용해
살짝 벌려 밤을 꺼냈다.
산비탈에 조용히 울리는 바스락거림은
가을 저녁의 리듬처럼 이어졌다.
주운 밤은 작은 바구니에 담겼다.
바구니 안에는
크고 작은 밤들이 섞여 들어 있었고
저마다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햇빛이 남아 있는 초저녁에는
밤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이 바구니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산비탈의 고요함 속에서 은근한 존재감을 남겼다.
밤을 줍는 동안
산비탈 아래에서는 모닥불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해 말려두었던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을 모아 천천히 불씨를 붙이면
어둠이 내려오는 속도보다 조금 빠르게
모닥불의 불빛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작은 불씨가 살아나
주황빛으로 번지면
산비탈의 공기는 한층 더 따뜻한 기운을 띠었다.
불이 커지기 전의 약한 타닥임은
밤 줍던 사람들까지 불러 모으는 신호 같았다.
모닥불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가져온 바구니를 내려놓고
오늘 주워 온 밤의 양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많이 주웠다고 크게 자랑하지 않았고
적게 주웠다고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람이 조금 더 빨랐던 자리,
밤송이가 많이 떨어졌던 자리를 이야기하며
서로의 자리와 시간을 공유했다.
모닥불 앞에서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불꽃은 그 대화를 조용히 비추었다.
모닥불의 열로 밤을 살짝 구워 먹는 것도
가을 저녁만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밤껍질이 뜨거운 공기를 머금어
조금 갈라지기 시작하면
구수한 향이 공기와 함께 퍼졌고
손에 들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뜨끈함이 전해졌다.
살짝 식힌 뒤 한입 베어 물면
속살은 부드럽고 달콤했고
그 맛은 긴 하루를 마무리해 주는
따뜻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불빛이 저물고 밤공기가 깊어지면
산비탈의 풍경은 더 고요해졌다.
모닥불 주변에는
조금 전까지의 따스함이 남아 있었고
사람들이 돌아간 자리에는
남은 잔불이 작게 흔들렸다.
주워온 밤이 담긴 바구니는
주인의 품에 안겨 천천히 산길을 내려갔다.
가을 저녁의 차가움 속에서도
바구니 속 밤은 온기를 오래 품고 있었다.
산비탈 밤줍기와 모닥불 풍경은
작은 놀이와 작은 휴식이 함께했던
마을의 소박한 풍경이었다.
특별한 행사가 아니었지만
가을의 냄새, 밤송이의 감촉,
모닥불의 빛과 따뜻한 대화가 한데 모여
한 계절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없지만
그날의 저녁 공기와 불빛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가을의 잔잔한 기억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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