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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의 공기는 낮과 전혀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작은 바람이 산자락에서 흘러 내려와 마을 골목을 천천히 지나갔다. 낮에는 흙냄새와 햇빛이 뒤섞여 있었다면, 밤이 되면 공기는 더 맑아지고, 달빛이 땅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을의 청년들은 이 시기가 오면 자연스럽게 하나둘 모였다. 모두가 기대하던 줄초롱 만들기 놀이가 시작되는 밤이었다. 이 놀이가 특별한 이유는 복잡한 행사도 아니고, 큰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달빛이 맑은 날,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이어져 온 작은 전통이었고,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시간이 되었다.

줄초롱은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다. 얇은 나뭇가지, 마른 풀줄기, 가볍게 말린 종이, 그리고 약한 바람에서도 흔들리는 작은 촛불까지, 어느 것 하나 대단한 도구는 없었다. 하지만 청년들이 한데 모여 손을 움직이면 평소 평범해 보이던 재료가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묶여 나가는 가지들은 곡선을 이루었고, 종이는 조심스럽게 말아 불빛을 감싸는 외피가 되었다.
줄초롱의 모양은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이는 종이를 넓게 말아 크게 만들었고, 다른 이는 길고 얇게 만들어 바람이 닿으면 흔들림이 더 크게 보이도록 했다. 종이의 주름과 촛불의 위치, 끈을 묶는 방식까지 모두 다르지만, 바로 그 다양함이 마을 밤길을 더 풍성하게 채우는 요소가 되었다.
줄초롱 하나가 완성되면 가운데에 촛불을 조심히 넣었다. 바람이 강하면 촛불이 쉽게 꺼지기 때문에 청년들은 손으로 윗부분을 가려가며 불을 붙였다. 촛불이 살아나는 순간 종이 안쪽에 노란빛이 번졌다. 그 빛은 종이의 얇은 결을 통과해 밖으로 새어나왔고, 달빛 아래에서 조용한 색을 드리웠다.
마을 어귀부터 시작되는 줄초롱의 행렬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별들이 땅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청년들은 서로 간격을 맞추어 걸었고, 줄초롱이 흔들릴 때마다 땅 위에도 부드러운 그림자가 일렁였다. 달빛, 촛불빛, 그리고 걸음이 합쳐진 그 풍경은 계절의 기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행렬은 논둑을 지나 작은 개울가까지 이어졌다. 물가에 다다르면 촛불의 빛은 물 위에 고요하게 반사되었고, 빛이 흔들리는 결이 물결과 함께 퍼져 나갔다. 물 위에 번지는 빛의 흔들림은 잠시 시선을 붙잡았고, 청년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봄밤의 고요함을 온전하게 느꼈다.
줄초롱을 들고 걷는 동안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천천히 걸으며 밤공기를 마시고, 서로의 줄초롱을 보며 웃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종이가 살짝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촛불이 흔들리는 모습에 모두가 잠시 멈춰 서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주었다.
행렬이 마을 끝자락에 가까워지면 줄초롱의 빛은 더 부드럽게 보였다. 촛불은 서서히 짧아져 갔고, 종이는 바람에 조금씩 더 구겨졌지만 그 모습조차 자연스러웠다. 청년들은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 촛불이 꺼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불이 꺼지는 순간, 종이 속에 남았던 마지막 빛의 잔열이 사라지며 밤의 어둠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줄초롱 놀이가 끝나면 청년들은 종이와 나뭇가지를 정리해 작은 모닥불 옆에 두었다. 누군가는 잠시 불을 쬐며 하루를 되돌아보았고, 누군가는 종이 결에 남아 있던 촛농을 살펴보며 다음에 더 잘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줄초롱을 들고 걸었던 길은 이미 어둠 속으로 돌아갔지만, 그 시간의 따뜻한 기운은 밤공기 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줄초롱 만들기와 달빛 길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봄밤의 기운을 담아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빛과 어둠이 함께 만들어낸 작은 축제였다. 그 빛들은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졌지만,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부드러운 남빛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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