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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던 고요한 오후 늦여름이 깊어갈 무렵이면부엌은 계절의 끝자락을 가장 먼저 느끼는 공간이었다.햇빛은 여전히 뜨거웠지만그 열기가 한낮처럼 거세지 않고마당을 스치며 부엌문으로 스며들 때면오히려 부드럽고 눅진한 느낌을 주었다.바람 속에는 이미 가을이 가까이 와 있다는얇은 신호가 함께 섞여 있었다.점심을 지나 조금 한적해진 시간,부엌에는 사람의 움직임보다공기와 기물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솥뚜껑은 벽에 기대어 있고채반 위에는 햇빛을 받아 색이 옅어진 채소 몇 줄이 놓여 있었다.불을 쓰지 않아도 남아 있는 은근한 온기와천천히 가라앉는 냄새들이 뒤섞이며부엌은 오후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부엌 바닥의 온도도조금씩 차분해졌다. 늦여름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던 고요한 오후 채소를 다듬는 일은서두를 필요가 없는 손놀림..
새벽 공기 스며든 마당에서 발걸음을 고르던 시간 집 안이 아직 고요한 새벽이면마당은 누구보다 먼저 하루를 맞이했다.기척이 거의 없는 시간대였지만공기 속에는 밤과 아침이 섞여 있는 듯한묘한 온기와 차가움이 함께 머물러 있었다.새벽 공기는 깊게 들이마시면온몸이 조금씩 깨어나는 느낌을 주었고,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기운이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사라졌다.마당의 흙은 밤새 식었다가새벽 첫 기운을 머금으며차갑고 부드러운 결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마당 위로 희미한 빛이 번지기 시작하면어둠 속에서 나무 기둥과 담장,그리고 작은 기물들의 형태가 천천히 드러났다.그 빛의 흐름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순간,마당은 하루의 첫 장면을 준비하는 공간이 되었다.새벽 공기 스며든 마당에서 발걸음을 고르던 시간이 시간은 누군가를 깨우려는 움직임도 없고서두를 이유도 없는 고요한 틈..
골목 끝 평상에 모여 이야기 나누던 밤 저녁이 깊어지면 마을의 모든 기운이 골목 끝으로 천천히 모여들었다.집집마다 들리던 저녁 준비 소리가 잦아들고문간에 걸린 등불만이 작은 흔들림을 남겼다.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의 골목은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그 고요함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평상으로 걸음을 옮겼다.평상은 낮 동안 햇빛을 많이 받아나무 결이 따뜻하게 식어 있는 상태였고,그 위에 앉으면 밤의 차가움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골목 끝 평상은 그저 앉는 자리가 아니었다.하루를 마무리짓기 전에 들렀다 가는작은 쉼터이자, 마을 사람들의 숨 고르는 공간이었다.누군가 먼저 앉으면조용히 인사를 나누며 옆자리를 채우는 식이었다.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밤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이곳이 오래전부터 나누어온 이야기의 중심이었기 때문..
장독대 둘레를 돌며 뚜껑을 정리하던 아침 아침 공기는 밤 사이 남아 있던 차가운 기운을 조금 품고 있었지만,햇빛이 천천히 마당으로 스며드는 순간부터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부엌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장독대였다.돌로 고르게 쌓아 올린 받침 위에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른 항아리들이 차분하게 놓여 있었고,그 위로 내려앉은 햇빛은아침의 시작을 조용하게 알려주는 듯했다.장독대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아침마다 풍경이 달라 보였다.햇빛이 비추는 각도,바람이 지나가는 속도,독 사이사이 고여 있던 밤새의 습기까지모두 다른 표정을 만들어냈다.독 뚜껑 위에 얹힌 작은 물방울이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며 흩어졌고,그 모습은 하루를 열어주는 첫 장면처럼 보였다.뚜껑을 정리하는 일은복잡하지 않지만 손길이 섬세해야 했다.바람이 강하게 불었던 날..
마루 끝에서 실꾸러미를 풀어내던 저녁 저녁빛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면집 안의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곤 했다.마루 끝은 하루 동안 들어온 햇빛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자리였고,그 위에 얇게 깔린 노을빛은소리가 크지 않은 작업과 잘 어울렸다.실꾸러미를 풀어내기 위해 이곳에 앉아 있으면저녁의 공기와 나무 바닥의 온기가적당히 섞여 고요한 흐름을 만들었다.실꾸러미는 한 번에 풀려나지 않았다.살짝 당기면 천천히 따라오는 부분이 있었고,어딘가에 숨어 있던 매듭이 불쑥 걸려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도 있었다.그러나 이런 과정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마루에 앉아 매듭을 하나씩 풀다 보면실이 제 모습을 되찾아 길게 이어졌고,손끝은 실의 감촉을 따라저녁 시간을 천천히 지나갔다.마루 아래에서는살짝 식어가는 흙냄새가 올라왔다.바람이 기둥 사이를 스칠 때마다..
초가집 뒤편에서 장작을 골라 쌓던 오후 초가집 뒤편은 늘 조용했다.사람들이 오가는 마당과는 달리이쪽은 바람이 천천히 지나가고햇빛도 지붕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졌다.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지만빛이 스며드는 부분에서는나무결이 선명하게 드러나장작을 고르기 좋은 자리였다.장작을 고르는 일은날씨와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지만오후의 시간대가 가장 적당했다.햇빛이 나무의 결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습기 여부도 금세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른 장작은 손에 들었을 때가벼우면서도 속이 단단한 느낌이 있었고,겉면을 살짝 두드리면묵직하지만 깔끔하게 울렸다.이 작은 감각들이 쌓여겨울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장작을 고르게 했다.초가 뒤편에 쌓여 있던 나무들은크기와 모양이 각각 달라우선 비슷한 길이부터 골라내야 했다.길이가 제각각이면쌓아 올릴 때 균형을 잡기 ..
솔숲 가장자리에서 낙엽을 모아두던 날 솔숲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은근한 향기를 품고 있었다.발을 옮길 때마다 풀잎과 마른 솔잎이 스치는 소리가가볍게 귓가에 닿았고,그 소리는 날씨와 상관없이숲이 지닌 고요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숲에 가까워질수록바람은 조금 더 차분한 결을 띠었고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아침부터 깔끔하게 선을 그으며 내려앉았다.솔숲 가장자리에는여름 내내 짙은 녹음으로 가려졌던 땅이가을이 오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솔잎 사이로 떨어진 낙엽은 색이 다양했고바람이 지날 때마다 가벼운 소리를 냈다.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가까이 다가와 손으로 낙엽을 들어 올렸다.손끝에서 느껴지는 질감은바삭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섞여 있어무심코 오래 만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낙엽을 모으던 날은딱히 정해진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누군가 숲가에..
사랑채에서 아이들 웃음이 모이던 한낮 한낮의 햇빛이 사랑채 앞마당까지 깊숙이 스며들던 날이면집 안은 유난히 따뜻한 분위기로 채워졌다.바람은 느슨했고,지붕 아래 드리워진 그늘도 부드럽게 흔들릴 뿐이었다.그런 날의 사랑채는아이들의 웃음이 머물기 좋은 자리였다.사랑채 마루는 넓지 않았지만몇 명이 둘러앉아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정갈하고 단단하게 다져진 공간이었다.발을 올리면 나무결이 온기를 품고 있어금세 편안한 기운이 돌았다.아이들은 그 위에 엎드리거나다리를 흔들며 옹기종기 모여들었고한낮의 빛은 그 모습을 환하게 비췄다. 사랑채에서 들리던 웃음은결코 큰 소리가 아니었다.자잘하게 흘러나오는 말,누군가 장난을 치며 나누던 작고 빠른 웃음,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누는 속삭임들이따뜻한 햇빛과 섞여사랑채 전부를 한결 밝게 만들었다.아이들은 마루 끝에 놓인 ..
장터 나갈 준비로 바구니를 손보던 저녁 장터 나갈 날이 가까워지면집 안의 공기는 조용히 긴장감을 품었다.대문 앞까지 이어지는 흙길에도어디선가 움직임이 스며 있었고집안에서는 저녁이 되자바구니를 꺼내 정리하는 준비가 자연스레 시작되었다.해가 기울고 색이 조금 누그러진 시간,바구니를 손보는 일은하루의 끝과 다음 날의 시작을 잇는 과정처럼 느껴졌다.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은부엌 한쪽에 기대어 둔 바구니들을 부드럽게 비추었다.햇볕 아래에서 오래 쓰인 바구니는결이 곳곳에서 닳아 있었고손잡이의 틈새는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흔적을 품고 있었다.바구니를 들어 올리면대나무가 마른 소리를 내며 옅게 흔들렸다.그 소리만으로도다음 날 마주할 장터의 풍경이 떠올랐다.바구니 손질은먼저 표면을 가볍게 닦아내는 일에서 시작되었다.바람과 먼지를 오래 맞은 결 사이에는작..
울타리 아래 콩잎을 널어 말리던 풍경 울타리 아래에는 계절마다 다른 색이 머물렀다.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는 시간,그 자리에서는 작은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지고바람이 지나가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고요한 집안의 시간을 부드럽게 흔들어 놓았다.특히 콩잎을 널어 말리던 날이면울타리 아래의 정취는 더욱 선명해졌다.콩잎을 따온 뒤한데 모아 물기를 털어내고소쿠리에 가볍게 펼쳐두는 일부터가 시작이었다.잎 하나하나의 결을 살피면초록빛이 남아 있는 부분과햇볕에 조금 더 드러난 부분이 미묘하게 달랐다.이 작은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은금세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울타리 아래 공간은 콩잎을 말리기에 참 알맞았다.햇빛이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고흙과 돌이 알맞게 펼쳐져 있어콩잎을 놓아두면 바람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이런 조건 덕분에과하게 눅눅해지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