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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끝 평상에 모여 이야기 나누던 밤

📑 목차

     

     


    저녁이 깊어지면 마을의 모든 기운이 골목 끝으로 천천히 모여들었다.
    집집마다 들리던 저녁 준비 소리가 잦아들고
    문간에 걸린 등불만이 작은 흔들림을 남겼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의 골목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고요함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평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상은 낮 동안 햇빛을 많이 받아
    나무 결이 따뜻하게 식어 있는 상태였고,
    그 위에 앉으면 밤의 차가움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골목 끝 평상에 모여 이야기 나누던 밤



    골목 끝 평상은 그저 앉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루를 마무리짓기 전에 들렀다 가는
    작은 쉼터이자, 마을 사람들의 숨 고르는 공간이었다.
    누군가 먼저 앉으면
    조용히 인사를 나누며 옆자리를 채우는 식이었다.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밤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이곳이 오래전부터 나누어온 이야기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평상 아래에는 낮 동안 떨어진 낙엽이 조금 모여 있었고
    밤바람이 불면 그 낙엽이 천천히 흩어졌다.
    바람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대화를 쉬어갈 때마다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등불 아래로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루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면 금세 표정이 부드러워지곤 했다.

    이야기의 첫마디는 늘 누군가의 가벼운 근황이었다.
    그날 들에서 있었던 일, 마당을 정리하다 본 작은 변화,
    혹은 지나가다가 마주친 계절의 조짐까지
    담백한 말투로 주고받다 보면
    대화는 어느새 어린 시절 이야기나
    마을에서 오래전 벌어졌던 일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말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을 공유해온 사람들만의 결이 있었다.

    평상에 앉아있으면
    골목을 따라 움직이는 작은 기척이 간혹 들렸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발소리,
    문을 닫는 소리,
    부엌에서 물을 붓는 소리 등
    멀리서 들려오는 생활의 소리들이
    밤의 배경을 채워주었다.
    그 소리들은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평상에서의 시간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사람이 돌아오면
    누군가는 자리 한쪽을 비켜주었고,
    누군가는 그날 들었던 소식을 다시 요약해 들려주었다.
    이런 작은 배려들은 누구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만들어 온
    자연스러운 질서 같은 것이었다.
    평상 위의 대화는
    유난히 서두르지 않았고
    이야기가 끊기면 잠시 침묵을 즐기기도 했다.

    밤하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졌다.
    별빛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오늘 하루의 일손이 어땠는지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들판에서의 손끝 감각,
    장독대에서 맡았던 냄새,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를 들으며 들었던 생각 등이
    큰 줄거리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는
    말하는 사람의 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그냥 조용히 들어주었다.

    때때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 실수를 떠올리며
    “그때 참 난감했지” 하고 웃으면
    다른 이들도 기억을 더듬으며 함께 웃었다.
    웃음의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밤공기 속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웃음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골목 끝의 어둠마저도 한층 부드럽게 보였다.

    평상 위에 앉아 발을 흔들다 보면
    나무결에 부드럽게 닿는 감촉이 전해졌다.
    온도가 조금씩 떨어지는 것도
    나무를 통해 먼저 느껴지곤 했다.
    추워진 사람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고
    다시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누군가 작은 담요나 겉옷을 들고 나오면
    그 움직임만으로도 밤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골목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하면
    평상에 남은 사람들도 슬슬 귀가할 준비를 했다.
    무슨 큰 결론을 내리는 것도 아니었고
    약속을 잡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일 보지요”라는 인사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히 하루의 마무리가 되었다.
    평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은
    밤의 끝과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사이에 놓인
    조용한 다리 같은 느낌이었다.

    모두가 돌아가고 나면
    평상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나 나무 위에는
    방금까지 머물렀던 온기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고
    그 온기는 다음 날 밤의 대화를 기다리는
    작은 흔적처럼 느껴졌다.
    골목 끝 평상에서 이어지던 이 밤의 풍경은
    특별한 준비 없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장면이었지만
    오래 지나도 잊히지 않는
    마을만의 조용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