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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실꾸러미를 풀어내던 저녁

📑 목차

     



    저녁빛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면
    집 안의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곤 했다.
    마루 끝은 하루 동안 들어온 햇빛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자리였고,
    그 위에 얇게 깔린 노을빛은
    소리가 크지 않은 작업과 잘 어울렸다.
    실꾸러미를 풀어내기 위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저녁의 공기와 나무 바닥의 온기가
    적당히 섞여 고요한 흐름을 만들었다.

    마루 끝에서 실꾸러미를 풀어내던 저녁



    실꾸러미는 한 번에 풀려나지 않았다.
    살짝 당기면 천천히 따라오는 부분이 있었고,
    어딘가에 숨어 있던 매듭이 불쑥 걸려
    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마루에 앉아 매듭을 하나씩 풀다 보면
    실이 제 모습을 되찾아 길게 이어졌고,
    손끝은 실의 감촉을 따라
    저녁 시간을 천천히 지나갔다.

    마루 아래에서는
    살짝 식어가는 흙냄새가 올라왔다.
    바람이 기둥 사이를 스칠 때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들이
    마루 판자 사이로 스며들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논두렁에서 울리는 개구리 소리가 들렸고,
    흐린 날에는 바람이 굽이치는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곤 했다.
    이런 소리들은 실을 푸는 손의 속도를
    더 천천히, 더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실꾸러미를 풀어내는 일은
    겉으로 보면 간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오랜 경험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힘을 너무 주면 실이 끊어졌고,
    너무 느슨하게 잡으면
    엉킨 부분을 놓쳐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목의 힘을 조절하며
    실의 움직임을 가늠했다.
    손끝이 실의 방향을 찾는 과정은
    마치 바람결을 읽는 일처럼 섬세했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저녁빛이 기둥에 길게 걸려
    늦은 오후의 여운을 남겼다.
    빛은 실꾸러미에도 살짝 스며들어
    얇은 가닥들이 은은한 색을 드러냈고,
    그 모습은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한 차분함을 안겨주었다.
    실을 잡고 있던 손도
    어느 순간 빛의 흐름을 따라 움직여
    리듬을 만들어냈다.

    작업이 절반쯤 진행되면
    풀려 있던 실들이 마루 위로 고르게 펼쳐졌다.
    길게 늘어진 실들은
    서로 엉키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고,
    가벼운 바람이 지나가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크지 않았지만
    저녁의 고요한 공기와 어우러져
    마루 끝에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냈다.

    잠시 손을 멈추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해가 지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기와지붕의 윤곽이
    조용하게 드러났다.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서 끊어졌다 이어지곤 했고,
    그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의 색은
    저녁 시간만의 온도를 품고 있었다.
    이 평온한 순간 속에서
    실꾸러미를 풀던 손도
    슬며시 속도를 늦추었다.

    풀어낸 실을 다시 감는 일은
    또 다른 정리 과정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실들이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모이기 시작하면
    마루 위에 잠시 흩어져 있던 긴 선들도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손에 감겨 들어오는 실의 온기는
    저녁의 공기와 섞여
    작업을 마무리하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작업을 끝내고 마루에 손을 짚으면
    나무는 낮 동안 받았던 햇빛을
    아직 조금 품고 있었다.
    그 온기는 하루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처럼
    손바닥에 은근히 전달되었다.
    집 안쪽에서는
    저녁밥을 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부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냄새는
    마루 끝까지 닿아
    하루의 끝을 부드럽게 알려주었다.

    실꾸러미를 풀어내던 이 저녁은
    큰 소리도, 특별한 움직임도 없었지만
    그 속에는 하루의 흐름을 정리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루 끝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빛과 바람, 손끝의 감각이
    차분하게 한 방향으로 이어졌고
    이 시간이 지나면
    낮동안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생각들도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아갔다.

    저녁의 빛이 모두 사라지고
    어둠이 점점 가까워지면
    작업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마루 위에 놓인 실꾸러미는
    다시 쓰일 때를 조용히 기다렸고,
    오늘 저녁의 장면은
    빛이 머물던 마루 끝에
    작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