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늦여름이 깊어갈 무렵이면
부엌은 계절의 끝자락을 가장 먼저 느끼는 공간이었다.
햇빛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 열기가 한낮처럼 거세지 않고
마당을 스치며 부엌문으로 스며들 때면
오히려 부드럽고 눅진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 속에는 이미 가을이 가까이 와 있다는
얇은 신호가 함께 섞여 있었다.
점심을 지나 조금 한적해진 시간,
부엌에는 사람의 움직임보다
공기와 기물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함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솥뚜껑은 벽에 기대어 있고
채반 위에는 햇빛을 받아 색이 옅어진 채소 몇 줄이 놓여 있었다.
불을 쓰지 않아도 남아 있는 은근한 온기와
천천히 가라앉는 냄새들이 뒤섞이며
부엌은 오후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부엌 바닥의 온도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늦여름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던 고요한 오후
채소를 다듬는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는 손놀림이었다.
칼이 나무 도마에 닿을 때마다
짧고 둔한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부엌의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을 정도로 잔잔했다.
칼끝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채소는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갈라졌고
그 단면에서는 늦여름 특유의 풋내가 은근하게 번졌다.
이 시간의 부엌은
계절을 준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오늘 다듬는 채소가
지금 당장 조리에 쓰일 수도 있었고,
며칠 뒤를 위해 소금에 살짝 절여 둘 수도 있었다.
어떤 용도로 쓰이든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정리는
하루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조용히 담아내는 듯했다.
채소를 씻기 위해
물단지를 기울이면
차갑고 맑은 물이 도마와 손등을 적셨다.
물이 흐르는 동안
채소의 잎과 줄기는 소리를 남기지 않았지만
결 사이사이에 남아 있던 흙이 떠오르며
부엌 바닥은 조금씩 촉촉해졌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 순간조차
늦여름의 고요함을 방해하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채소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잎 하나하나에 은근히 스며 있는 윤기,
줄기를 자를 때마다 드러나는 속살의 색,
그리고 부엌 바닥에 생기는 얇은 그림자까지
모두 늦여름 오후의 부드러운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 빛은 늘 움직였지만
속도는 느렸고,
부엌 안에서 천천히 자리를 바꾸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알려주는 조용한 기준이 되었다.
채소를 다듬는 손길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 살았던 사람의 손에는
어떤 부분을 남기고
어떤 부분을 버려야 하는지
몸이 먼저 기억하는 흐름이 있었다.
잎이 얇아진 가장자리,
햇빛을 오래 받아 질감이 바뀐 부분,
물이 닿으면 쉽게 부서질 것 같은 결까지도
손끝은 조용히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골라냈다.
부엌 한쪽에 놓인 항아리와 그릇들은
오늘의 작업을 기다리듯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소금, 고추씨, 마늘, 마른 풀잎들…
필요한 것들은 늘 일정한 위치에 있어
손을 뻗으면 바로 닿았고
그 익숙함 속에서 부엌은
작은 노동이 이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문 밖에서는
잠깐 스친 바람이 처마 아래 풍경을 흔들었다.
작은 금속 울림이 이어지면
부엌 안의 차분함과 어울려
오후의 분위기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때때로 강아지가 마루를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늦여름 오후의 고요함을 해치지 않을 만큼
가볍게 지나갔다.
채소 손질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도마 위에는 다양한 색의 조각들이 남았다.
잘려 나간 잎사귀와 줄기들,
쓰임을 다한 부분들은
부엌 바깥 작은 퇴비함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남은 조각들은
곧 흙과 섞여 다음 계절의 밭에 다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부엌에서 흙으로,
흙에서 다시 식탁으로 이어지는 이 순환이
농촌의 시간 속에 늘 흐르고 있었다.
작업을 끝내고
부엌문을 살짝 열어 마당을 바라보면
햇빛은 이미 조금 기울어 있었다.
부엌 안에 남아 있는 냄새는
잘게 썬 채소의 풋내와
미약하게 남은 장작 향이 섞여
오후의 끝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채소를 다듬는 일은
그리 큰 작업이 아니었지만
한 계절의 마지막을 정돈하는
은근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늦여름 부엌에서 채소를 다듬던 이 시간은
분주한 하루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수 있는 고요한 틈이었다.
손끝은 계속 움직였지만
마음은 그 움직임에 맞춰 조용히 내려앉았다.
오후 햇살이 천천히 색을 바꾸는 동안
부엌은 계절의 마지막 기운을 간직한 공간이 되어
머지않아 올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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