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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년들이 봄밤에 하던 달빛 길놀이 줄초롱 만들기 봄밤의 공기는 낮과 전혀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작은 바람이 산자락에서 흘러 내려와 마을 골목을 천천히 지나갔다. 낮에는 흙냄새와 햇빛이 뒤섞여 있었다면, 밤이 되면 공기는 더 맑아지고, 달빛이 땅 위에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을의 청년들은 이 시기가 오면 자연스럽게 하나둘 모였다. 모두가 기대하던 줄초롱 만들기 놀이가 시작되는 밤이었다. 이 놀이가 특별한 이유는 복잡한 행사도 아니고, 큰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달빛이 맑은 날,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이어져 온 작은 전통이었고, 그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시간이 되었다.줄초롱은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었다. 얇은 나뭇가지, 마른 풀줄기, 가볍게 말린 종이, 그리고 약한 바..
장마 뒤 들판에서 이어지던 무더위 식히기 갈잎 그늘 만들기 장마가 끝나면 들판의 공기는 금세 다른 계절처럼 변했다. 긴 비가 멎은 뒤의 햇빛은 유난히 가깝게 내려앉았고 논과 밭 주변의 흙은 빠르게 마르며 여름 특유의 뜨거운 숨결을 다시 드러냈다. 땅 위에 남아 있던 물자국은 햇빛을 몇 번 더 받자마자 금세 사라졌고, 들판을 스치는 바람마저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는 잠시라도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필요했고, 마을에서는 갈잎을 이용해 여름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그늘 만들기가 조용히 이어지곤 했다. 장마 뒤의 들판은 색이 선명했다. 햇빛을 가득 머금은 벼잎은 힘 있게 고개를 들고 있었고, 비를 흠뻑 먹은 풀들은 더 짙은 초록빛을 낸 채 밭뚝 주변을 채웠다. 땅 위로 올라오는 열기는 한여름의 시작을 알렸고, 이 시기에 갈잎을 꺾어 그늘을 만드는..
봄철 집 뒤 밭둑에서 이어지던 토끼풀 엮기 놀이 새벽 햇빛이 얇게 들판을 덮기 시작하면 집 뒤 밭둑에는 다른 계절과는 전혀 다른 색이 올라왔다. 겨울 동안 보이지 않던 초록빛이 땅 가까이에서 천천히 퍼졌고, 낮은 풀들 사이로는 봄 특유의 부드러운 기운이 고르게 스며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작은 잎을 가지런히 펼친 토끼풀이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잎들이 촘촘히 모여 땅을 덮고 있었고, 이 초록빛이 퍼지는 속도만 봐도 봄이 이미 들판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밭둑은 집과 들판의 사이에 놓인 작은 경계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늘 가장 넓은 놀이터였다. 흙이 부드럽게 풀리는 시기에는 밭둑을 걷는 느낌이 한층 다르게 전해졌다. 발끝이 가볍게 파묻히는 촉감과 함께 흙 속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겨울 동안 잊고 있던 자연의 온기를 선명..
마을 공동빨래터에서 이어지던 겨울 빨래날 겨울이 깊어지면 마을의 공기는 서늘함을 넘어 단단한 정적을 품었다.물가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부터 차가운 기운이 먼저 손끝을 스쳐 지나갔고,한 해의 끝을 향해 가는 시기의 성근 바람은 낮게 깔린 논둑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그런 계절에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꼭 해야 하는 날이 있었으니,바로 공동빨래터에서 모여 겨울 빨래를 하던 날이었다. 겨울 빨래날은 따로 정해진 규칙이나 의식은 없었지만집집이 쌓인 이불과 겉옷, 두터운 홑청 등을 한 번에 정리해야 하는 시기라누군가 먼저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다른 집도 따라 준비를 시작했다.아직 해가 완전히 오르지 않은 시간,마을 어귀 아래로 난 돌길 따라 여럿의 발걸음이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빨래터는 마을 뒤편 작은 개울을 따라 만들어진 평평한 돌판이었다.여름에는 아이들이 ..
산비탈 밤줍기 놀이와 저녁 모닥불 풍경 가을이 깊어지면산비탈의 공기는 낮과 저녁이 뚜렷이 갈리는 색을 띠었다.햇빛이 천천히 낮아지는 오후 무렵이면산자락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지고떨어지는 바람 속에는 밤송이의 향이 은근하게 섞여 있었다.마을 사람들은 이맘때가 되면자연스럽게 산비탈로 향했고,밤송이가 떨어진 자리를 찾아조용히 둘러보며 밤줍기를 시작했다.밤나무 주변은낮 동안 햇빛을 듬뿍 받은 뒤저녁이 가까워지며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낙엽 위로 떨어진 밤송이들은빛에 반사되어 은근한 윤기를 띠었고가까이 다가가면밤송이 사이로 살짝 드러난 알밤이곳곳에서 작은 숨을 쉬는 듯 보였다. 밤 줍기는 서두르지 않는 놀이였다.발끝으로 낙엽을 살짝 밀어보면그 아래 숨어 있던 밤송이가 드러났고송이를 조심히 돌려가며 벌린 틈 사이로알밤을 꺼내는 과정은작지만 특별한..
장터 나가는 날 준비하던 바구니 엮기 풍경 장터가 열리는 날이 가까워지면마을의 공기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해졌다.장터에 갈 준비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고집집마다 장에 내놓을 물건을 정리하거나바구니·광주리를 손질하는 시간이 따로 필요했다.초겨울이나 이른 봄의 장터 준비는그 계절만의 차분한 기운 속에서 조심스럽게 이어지곤 했다.장에 가져갈 물건보다 먼저 챙겨야 하는 것이바로 ‘바구니’였다.이 바구니들은 장터까지 들고 가는 동안물이 흐르거나 흔들림이 생겨도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엮는 과정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갔다.바구니를 엮기 위해 우선마른 갈대나 줄기를 물에 적시는 일부터 시작되었다.딱딱해진 갈대는그대로 사용하면 쉽게 갈라졌기 때문에물이 충분히 스며들어 부드러워질 때까지한동안 그대로 두었다.손끝으로 줄기를 눌러보면처음의 거친 ..
초겨울 장독대에서 간장 햇볕 들여놓던 풍경 초겨울이 되면 마당의 공기는 한결 가벼워지지만그 안에는 흐릿한 냉기가 길게 머물러 있었다.아침 햇살은 여전히 낮았고장독대 위에 드리운 그림자는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고요하게 알려주었다.이맘때가 되면 장독대에서는 늘 같은 풍경이 이어졌고그 풍경 속에는 오래된 시간과 손길이 함께 담겨 있었다.장독대는 집 뒤편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았다.바람을 막아주는 담장이 있었고낮 동안 햇빛이 길게 드리워지는 자리였다.초겨울 햇살은 강하지 않았지만맑고 투명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장독대의 온기를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장독대 뚜껑을 여는 순간은은한 말림 향과 장맛이 섞인 깊은 냄새가조용히 공기 위로 퍼졌다.간장은 햇빛을 받기 위해뚜껑을 살짝 열거나 완전히 열어 놓기도 했는데이 과정은 계절마다 달라졌고초겨울에는 ..
마을 어귀 큰 우물가에서 이어지던 새벽 물길 닦기 새벽의 공기는 밤과 낮 사이의 경계처럼 고요했다.아직 햇빛이 들지 않은 시간이라 공기는 차가웠지만머지않아 동쪽 하늘이 밝아올 것이라는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마을 어귀에 있는 큰 우물은 이 시간대에 가장 깊은 고요를 품고 있었고그 고요함 속에서 물길을 닦는 일은 오래된 풍습처럼 이어졌다.우물가로 가는 길은 새벽 이슬로 촉촉했다.짧은 발자국마다 흙의 온기가 느껴졌고짙은 새벽 안개가 우물 주변을 살며시 감싸고 있었다.마을 사람들에게 우물은 그저 물을 길어 올리는 장소가 아니라하루의 첫 기운을 깨우는 장소처럼 여겨졌다.우물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 소리였다.밤사이 생긴 안개의 물기가 우물가 돌담으로 스며들며새벽의 정적과 맞물려 잔잔한 소리를 만들었다.우..
늦가을 담장 아래에서 콩타작하던 마당의 하루 늦가을의 공기가 마당에 스며들던 날이면 담장 아래에는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말린 콩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햇빛은 이미 한결 차가워졌지만, 낮은 각도로 내려오는 빛은 마당의 흙 위에 은근한 따스함을 남겼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하루를 천천히 열어주는 작은 신호처럼 들렸다.이 계절의 마당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겼다. 적막한 듯하지만 깊지는 않았고, 금방이라도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조용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담장 아래에 세워둔 콩대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른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늦가을이 주는 리듬 같았다.콩타작을 준비하는 시간은 늘 차분했다. 마당 한가운데 큰 돗자리를 펼치고 그 위에 말린 콩대를 얹으면 고즈넉한 풍경이 완성되었다. 돗자리 아래의 흙은 밤 사이의 냉기..
초여름 도랑가에서 물길을 살피던 하루 장마가 오기 전의 들판은계절이 바뀌는 기운이 가장 먼저 스며드는 자리였다.햇빛은 초여름 특유의 따뜻함을 품고 있었고,흙에서는 낮 동안 모아 두었던 열기가서서히 피어오르듯 은근하게 퍼졌다.논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풀들은바람을 맞아 천천히 흔들렸고,그 아래에는 한 해 농사의 중요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장마 전 논두렁을 보수하는 일은무엇보다도 물길을 안정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물이 일정하게 흘러야 벼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고,흐름이 흐트러지면장마철의 큰비에 논둑이 무너지기 쉬웠다.그래서 이 시기에는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들판에 모여논두렁을 점검하고 고치는 일이 이어졌다.아침 햇빛이 땅 가까이서 반짝일 때사람들은 논으로 향했다.흙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발밑에서 살짝 눌리는 느낌이 있었고,그 촉촉한 느낌이이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