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새벽 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은 어느 초겨울,
장독대가 있는 마당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조용했다.
밤새 식은 흙냄새가 은근히 퍼져 있었고,
장독대 위로 내려앉은 얇은 서리는 빛을 받으면 금세 사라질 듯했다.
김칫독을 살피는 날이면 마당의 분위기 전체가
어디론가 향하려는 숨 같은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햇빛이 닿기 전이라 항아리 표면은 차가웠고,
밤새 머금은 냉기가 장독대 주변의 공기까지 조금 더 깊게 만들었다.
뚜껑 위에는 마른 솔잎 몇 개가 내려앉아 있었고,
항아리는 그 자체로 한 해 동안의 시간을 차분히 품어내는 듯했다.
김칫독을 살피는 일은
그저 뚜껑을 열어 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마을에서는 초겨울 바람의 흐름,
햇빛의 각도,
밤의 온도까지 모두 고려해
김칫독의 호흡을 맞추는 날로 여겨졌다.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지는 시기에는
항아리 안의 김치가 천천히 익어가며
산미의 깊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면
항아리 속에서 올라오는 김치 고유의 향이
새벽 공기와 뒤섞여 은은하게 번졌다.
강하지 않고,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향기였다.
항아리 벽면에 스며든 시간의 냄새와
김칫속의 향이 하나로 섞여
연한 바람처럼 마당을 채웠다.
이 향은 집집마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고,
그 차이는 집안의 손맛과 세월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김칫독을 살피기 위해
사람들은 항아리 옆에 서서
손끝으로 소금물의 간을 확인하거나
김칫속의 숨이 아직 살아 있는지를 살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온도,
살짝 올라오는 기포의 움직임,
김칫잎의 탄력
손이 조금 차가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항아리와 대화를 나누듯 조심스럽게 살폈다.
장독대의 흙바닥은
아침 햇빛이 닿기 전엔 조금 차가웠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
조금씩 온기를 되찾았다.
항아리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듯 선명했고,
그 바람이 항아리 표면에 닿을 때마다
옅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김칫독이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작은 호흡처럼 느껴졌다.
김칫독을 살피던 사람들은
때때로 항아리 뚜껑을 살짝 집어 올렸다가 다시 덮고,
항아리의 위치를 아주 조금 조정하곤 했다.
햇빛이 가장 알맞게 드는 자리,
바람이 너무 세지 않게 스치는 자리,
서늘하지만 지나치게 춥지 않은 자리—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해
항아리의 방향과 공간을 맞춰주는 작업은
작지만 중요한 과정이었다.
한참 동안 항아리들을 살핀 뒤
잠시 장독대 뒤편에 서서 마당을 바라보면
항아리들은 새벽 햇빛을 받아 조금씩 색을 달리했다.
갈색과 검은빛이 섞인 항아리 표면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그 사이사이 비어 있는 공간에
겨울 공기가 곧게 내려앉았다.
이 고요한 풍경은
김칫독을 살피는 날에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취였다.
점차 해가 오르면
장독대 위의 서리는 빠르게 사라지고
항아리 뚜껑 위에서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가
금세 증발했다.
이 변화는 김칫독이
새 계절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순간 같았다.
마당의 흙은 햇빛에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장독대 주변의 공기는
새벽보다 한층 따뜻해졌다.
김칫독 살피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항아리들이 햇빛 아래에서
조용히 빛나는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뚜껑이 단단히 닫힌 모습은
겨울을 견딜 준비를 모두 마친 듯했고,
항아리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는
겨울 김치가 익어가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렵지만
장독대 둘레에 모여
김칫독의 숨을 살피던 하루는
계절을 맞이하는 마음,
음식을 보관하는 기술,
그리고 집집마다 이어온 삶의 흐름을
차분히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날의 공기와 향,
항아리의 온도와 새벽의 색깔은
오래 지나도 잔잔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된다.
'사라진 마을 축제와 전통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추석 이틀 전, 마당에서 송편 빚던 손끝의 풍경 (0) | 2025.12.08 |
|---|---|
| 봄밤 대청마루에서 이어지던 할머니의 옛이야기 모임 (0) | 2025.12.08 |
| 겨울 밤, 사랑방에서 이어지던 호미자루 갈던 시간들 (0) | 2025.12.07 |
| 늦여름 꿀벌 산벌 피하는 날, 벌통 주변 돌보기 풍경 (0) | 2025.12.07 |
| 저녁나절 우물가 옆 평상에서 이어지던 여름 부채 만들기 (0)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