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장마가 오기 전의 들판은
계절이 바뀌는 기운이 가장 먼저 스며드는 자리였다.
햇빛은 초여름 특유의 따뜻함을 품고 있었고,
흙에서는 낮 동안 모아 두었던 열기가
서서히 피어오르듯 은근하게 퍼졌다.
논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풀들은
바람을 맞아 천천히 흔들렸고,
그 아래에는 한 해 농사의 중요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마 전 논두렁을 보수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물길을 안정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물이 일정하게 흘러야 벼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고,
흐름이 흐트러지면
장마철의 큰비에 논둑이 무너지기 쉬웠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용히 들판에 모여
논두렁을 점검하고 고치는 일이 이어졌다.
아침 햇빛이 땅 가까이서 반짝일 때
사람들은 논으로 향했다.
흙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발밑에서 살짝 눌리는 느낌이 있었고,
그 촉촉한 느낌이
이 계절이 곧 바뀐다는 신호처럼 다가왔다.
논두렁 주변을 걸으면
작은 물소리가 먼저 들렸다.
물길이 천천히 움직이며
논과 논 사이를 이어주는 소리였다.
논둑 보수는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주의 깊게 해야 하는 일이었다.
흙이 단단히 굳으면 물이 넘어가지 않고
너무 부드러우면 쉽게 무너졌다.
사람들은 논 가장자리를 돌며
손으로 흙을 눌러 상태를 확인했다.
손바닥에 닿는 흙의 촉감이
단단한지, 물기가 많은지
작업의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이 되었다.

물이 새는 자리나 흙이 갈라진 곳이 보이면
그 부분을 먼저 다져야 했다.
흙을 퍼 올려 논둑 위에 놓고
손이나 나무 도구로 꾹 눌러
잘 다지면 틈이 점차 사라졌다.
이 과정은 속도가 중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한 번에 너무 많이 다지지 않고
여러 번 눌러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오래 버티는 논둑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초여름 들판의 공기는
지나가는 바람에 따라
따뜻함과 선선함이 번갈아가며 느껴졌다.
물 위로 비치는 햇빛은
부서져 반짝였고
논둑을 따라 난 길에는
작은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걷다 보면
흙의 온도와 바람 속 수분의 기운이
하루의 변화를 조용하게 알려주었다.
보수 작업을 도와주러 나온 사람들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장마 전에 하는 이 일은
마을 전체가 평소에 하던 농사와 달리
흐름을 맞추기 위한 준비였기 때문에
모두가 평온한 속도로 움직였다.
누군가 흙을 가져오면
다른 사람은 그 흙을 다지고
또 다른 사람은 물길을 확인하는 식이었다.
논두렁 아래쪽에서는
갑자기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보이기도 했다.
흙의 작은 틈 사이로 물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자리였다.
그런 부분은 놓치지 않고 흙을 덮어
물길이 안정되도록 조절했다.
손으로 누르면
흙 사이에 있던 공기가 작게 빠져나왔고
그 소리는
땅이 새로운 계절에 적응하는 것처럼 들렸다.
햇빛이 조금 더 강해지면
논 위의 물은
하얀 빛을 머금은 듯 반짝거렸다.
물결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미세한 흔들림이
잔잔한 울림처럼 퍼졌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
보수한 부분을 다시 확인하고
작업이 제대로 되었는지 살폈다.
논둑 위에 쌓인 흙은
해가 오른 뒤
아침보다 조금 더 빠르게 굳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밟아준 부분은
자연스럽게 다져져
물길을 잘 잡아주는 형태가 되었다.
이렇게 하루 동안 이어진 작업은
크지 않은 움직임이지만
장마철 내내 논을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작업이 끝나고 들판을 돌아보면
논과 논을 나누는 길은
전보다 훨씬 고르게 자리 잡아 있었다.
흙의 결과 물길의 흐름이
안정된 모습으로 이어졌고
바람이 논둑 위를 스칠 때
흙먼지가 날리지 않을 만큼
탄탄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 기울기 시작하면
논 위의 빛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방금 다져 놓은 흙 위로
노란빛이 내려앉고
그 위에서 들판의 소리는
한층 잔잔하게 이어졌다.
여름 장마 전에 마을이 함께 준비한 이 하루는
넓은 들판에 남아
오랫동안 흐름을 지켜주는 밑바탕이 되었다.
장마 전 논두렁 보수는
누군가의 이름이 남는 일이 아니었지만
마을과 들판을 지켜온 중요한 풍경이었다.
물길이 안정되어야
벼가 자라고
가뭄이나 큰비에도
흙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조용한 하루는
한 계절을 넘어가는 다리를
차분하게 놓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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