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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공기가 마당에 스며들던 날이면 담장 아래에는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말린 콩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햇빛은 이미 한결 차가워졌지만, 낮은 각도로 내려오는 빛은 마당의 흙 위에 은근한 따스함을 남겼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하루를 천천히 열어주는 작은 신호처럼 들렸다.
이 계절의 마당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풍겼다. 적막한 듯하지만 깊지는 않았고, 금방이라도 일이 시작될 것 같은 조용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담장 아래에 세워둔 콩대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마른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늦가을이 주는 리듬 같았다.

콩타작을 준비하는 시간은 늘 차분했다. 마당 한가운데 큰 돗자리를 펼치고 그 위에 말린 콩대를 얹으면 고즈넉한 풍경이 완성되었다. 돗자리 아래의 흙은 밤 사이의 냉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햇빛이 닿는 자리마다 조금씩 온기가 번졌다. 준비 과정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마당 전체가 작업을 위한 흐름을 맞춰가는 느낌이었다.
콩대는 손에 쥐면 바삭한 소리를 냈다. 마디마다 단단하게 말라 있어 가볍게 두드리기만 해도 안에 담긴 콩알이 톡 하고 떨어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담장 아래 쌓아둔 콩대를 옮기는 동안에도 작은 알갱이들이 바닥에 부딪히며 고른 소리를 냈다. 흙과 콩이 어우러진 그 풍경은 이 계절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콩대는 일정한 박자에 맞춰 도구로 두드려졌다. 빠르지 않았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였다. 두드릴 때마다 콩알이 껍질에서 튀어나와 돗자리 곳곳으로 흩어졌고, 햇빛에 반사된 콩알은 은근한 빛을 냈다. 콩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마른 소리와 두드리는 소리가 함께 얽혀 늦가을 마당만의 울림을 만들었다.
콩타작은 단순한 노동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의 경험이 담겨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두드리면 콩알이 덜 튀는지, 어느 정도 힘을 주어야 껍질이 잘 벗겨지는지 몸으로 익히고 기억한 감각이었다. 콩대를 뒤집어가며 두드리는 움직임 속에서 마당의 공기는 조금 더 따뜻해졌고, 콩 껍질의 향이 은근하게 흩어졌다.
작업 중에는 바람도 중요한 요소였다. 바람이 일정하게 불어주면 콩 껍질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돗자리 가장자리로 밀려갔다. 껍질이 모인 자리에는 가벼운 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고, 콩알만이 돗자리 중앙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바람이 잠시 멎으면 공기는 고요해졌고, 다시 바람이 불면 껍질이 사르르 움직였다.
담장 아래 자리 잡고 앉아 잠시 손을 쉬면 늦가을 햇빛이 한결 깊게 느껴졌다. 담장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그 위로 말린 콩대의 실루엣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때의 공기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머물러도 불편하지 않은 온도를 유지했다. 콩타작은 노동이면서도 계절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콩알이 충분히 모이면 돗자리를 가볍게 들어 콩알을 한쪽으로 모았다. 작은 콩알들이 모여 만드는 소리는 청아했고, 바닥에서 부딪히는 소리는 마당 전체에 잔잔하게 울렸다. 콩의 표면은 단단했고, 알갱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작은 그림자들을 만들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면 하루의 작업이 절반쯤 지나고 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작업이 끝날 무렵이면 마당의 공기도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 오후의 빛은 담장 위에서 점점 낮아졌고, 콩대는 더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돗자리를 접고 콩을 바구니에 담아 올리는 순간, 하루 동안 이어진 노동이 비로소 정리되는 듯했다. 바람은 여전히 마른 냄새를 머금고 있었고, 작은 콩껍질이 바람 따라 움직이며 마당을 스쳐 지나갔다.
늦가을 담장 아래에서의 콩타작은 크게 특별한 의식은 아니었지만, 계절과 함께 움직이며 마당의 흐름을 따르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콩알 하나하나에 담긴 햇빛과 바람, 일상의 조용한 움직임은 오래 지나도 선명하게 남았다. 그날의 마당은 늦가을이 주는 고요함과 따스함을 담은 작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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