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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 아래 처음 뒤집히던 흙의 결

📑 목차

    초봄의 들판은 겨울을 다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람의 결이나 흙의 냄새에서는
    계절이 천천히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어김없이 전해졌다.
    아직 새순이 돋기 전이라 산과 들은 색이 옅었지만,
    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밤새 얼었다 녹은 흙이 촉촉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초봄 들판에서 첫 밭갈이 준비하던 날

    겨울 동안 고요하던 마을도
    이 시기가 오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농기구를 손보고,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마른 줄기들을 치우며
    한 해를 준비하는 손길이 이어졌다.
    밭갈이를 준비하는 날은
    새로운 농사를 맞이하는 첫 문을 여는 시간 같았다.

    들판으로 가는 길은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풀잎 끝에서 작은 물방울이 반짝였다.
    밤새 얼었던 흙이 부드럽게 녹는 동안,
    땅은 발자국을 살짝 받아주는 듯한 감촉을 보여주었다.
    긴 겨울을 버티고 난 흙의 질감은
    이제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할 힘을 품고 있었다.

    밭 언저리에 모여 있는 나무 도구들은
    겨울을 지나며 건조해진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호미와 낫의 날은 아침빛을 받아 은근히 반짝였고,
    쟁기는 땅의 첫 결을 가르는 역할을 맡기 위해
    한쪽에 기대어 있었다.
    도구를 손에 쥐면
    목재가 품고 있던 겨울의 차가움이 그대로 전해졌고,
    그 차가움은 손바닥에서 조금씩 따뜻하게 바뀌었다.

    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직 갈리지 않은 넓은 흙의 면이었다.
    겉은 단단해 보였지만
    발끝으로 눌러보면
    표면 아래는 이미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초봄 들판은 이런 이중적인 결을 품고 있어
    농사 준비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상태였다.

    첫 밭갈이는
    땅이 숨을 돌리고 있는 순간에
    천천히 리듬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쟁기를 잡아당기면
    흙이 갈라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소리라기보다
    땅의 호흡이 바뀌는 느낌에 가까웠다.
    표면 아래에 있던 흙이 위로 올라와
    햇빛을 처음 맞는 장면은
    매년 보아도 새롭게 느껴졌다.

    땅이 갈리는 방향을 따라
    작게 갈라진 덩어리들이 흩어지면
    그 사이로 겨울 동안 잠들어 있던 작은 생명들도 드러났다.
    곤충들의 흔적이 보이기도 했고
    마른 뿌리가 깨어나는 모습도 눈에 담겼다.
    이 시기의 밭은
    작은 움직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밭갈이를 도우러 나온 어른들은
    말없이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는 흙을 고르고,
    누군가는 경계를 맞추며
    땅의 흐름을 하나로 이어갔다.
    움직임과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속도와 방향이 자연스레 균형을 이루며
    작업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초봄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이내 뺨에 열이 돌았다.
    쌀쌀한 기운 속에서도
    밭에서는 따뜻함이 은근하게 생겨났다.
    땅이 갈라지며 풍기는 냄새는
    겨울 동안 묵혀 두었던 시간을 털어내는 듯했고,
    그 냄새만으로도
    한 해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밭이 절반쯤 갈린 뒤
    사람들은 잠시 쟁기를 내려놓았다.
    흙 위에 비치는 햇빛은
    조금 전보다 부드러워졌고,
    바람의 속도도 한결 느려졌다.
    잠시 서서 들판을 바라보면
    갈아엎힌 흙의 결이 고르게 이어져 있었다.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게 털어낸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밭둑에 앉아
    어른들이 하는 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갈아엎힌 흙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흙의 온도를 느껴보기도 했다.
    아이들 옆에서
    작은 새들이 흙을 쪼아 먹을 것을 찾는 모습도 보였고,
    부드러워진 흙 사이에는
    벌레와 씨앗의 흔적이 은근히 드러나 있었다.

    해가 조금 더 오르면
    밭 전체는 얇은 안개 같은 햇빛으로 덮였다.
    더는 얼지 않는 땅,
    고른 결을 가진 흙,
    그리고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의 질감이
    한 해 농사를 맞이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밭갈이를 마무리한 뒤
    사람들은 도구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새로운 계절의 냄새를 머금은 흙은
    도구의 표면을 빠르게 물들였지만
    그 흔적조차
    초봄 들판의 일부처럼 보였다.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들판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땅 아래에서는
    이미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봄 들판에서의 첫 밭갈이는
    소리 없는 준비이면서
    가장 중요한 시작이었다.
    겨울 내내 굳어 있던 흙이
    사람의 손과 바람, 햇빛을 만나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이날의 풍경은
    오래 지나도 잔잔하게 남아
    한 해 농사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