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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가까워지는 초여름이면 마을의 들판에는 다른 계절과는 다른 긴장감이 번져 있었다. 햇빛은 이미 한낮의 열기를 띠고 있었고 논 주변의 풀들은 빠르게 자라며 초여름의 빛을 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들판은 고요해 보였지만 그 속에서는 장마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논두렁을 보수하는 일은 마을에서 매년 빠짐없이 하던 중요한 과정이었다. 장마철에 물이 넘치면 모가 쓰러지고 논 전체가 파이기 때문에, 여름을 준비하는 이 작업은 들판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계절 의식처럼 여겨졌다. 아침 햇살이 땅 위에 길게 드리워질 때 사람들은 도구를 챙겨 논둑으로 모였다.
논둑에 가까이 다가가면 흙과 풀냄새가 함께 섞여 묘한 초여름의 향을 만들었다. 물길을 따라 난 좁은 길은 전날 내린 이슬 때문에 곳곳이 촉촉했고 발끝에는 흙이 조용히 들러붙었다. 도랑을 따라 흐르는 물은 아직 잔잔했지만 멀지 않은 장마를 예고하듯 곳곳에서 속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보수 작업은 먼저 논둑을 따라 천천히 걷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흙의 틈이 어디인지, 물이 가장 먼저 넘칠 것 같은 자리가 어디인지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흙은 겉으로 보기엔 단단해 보였지만 손끝으로 눌러보면 약해진 부분이 금세 느껴졌다. 그런 자리는 비가 오면 금방 물길이 쏟아져 내려 논을 위협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먼저 손을 대야 했다.
손으로 흙을 모으고, 발로 눌러 단단하게 다지는 동작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복되는 움직임 속에는 오랜 경험이 담겨 있었다. 어디를 높이고 어디를 파야 물길이 고르게 흐르는지, 어느 만큼의 흙을 더해줘야 비가 내려도 버틸 수 있는지 몸으로 기억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흙을 쌓아 올릴 때는 물소리가 잠시 멈춘 듯했고 그 사이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햇빛이 점점 강해질수록 논둑 위의 공기는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 열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묵묵히 흙을 다졌고, 필요한 자리엔 새 흙을 덧대어 물길을 정비했다. 멀리서 보면 움직임이 큰 일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흙 한 줌이 여름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좁은 도랑 근처에서는 더욱 세심한 작업이 이어졌다. 물길이 좁아진 곳은 살짝 파내어 흐름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반대로 물이 빠르게 흘러 땅을 파내려가는 곳은 흙을 더 쌓아 균형을 잡았다. 물은 사람의 손길에 따라 천천히 방향을 바꾸었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듯한 모습은 논둑 보수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점심 가까운 시간이 되면 들판의 공기는 묵직한 열기로 가득 찼다. 그래도 일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장마가 오기 전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논둑의 약한 부분을 모두 점검하고 나면 물길을 따라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하루의 작업을 정리했다. 손에 묻은 흙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무게는 곧 여름을 준비했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작업이 끝나갈 무렵 들판을 바라보면 논둑의 선이 훨씬 단정해져 있었다. 물은 고르게 흐르고 있었고 논물 위로 비치는 초여름의 빛은 조금 더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벼잎이 가볍게 흔들렸고 그 너머로는 천천히 흐르는 물길이 잔잔한 광택을 띠며 이어져 있었다.
저녁빛이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하루의 보수 작업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흙냄새는 더 짙어졌고 논둑 위에 남은 발자국은 하루 동안 이어진 움직임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 장마가 찾아오기 전 들판에서 보내던 이런 하루는 여름을 준비하는 마을만의 방식이었고, 작은 흙더미 하나까지도 그 계절을 지켜내기 위한 소중한 흔적이었다.
여름 장마 전 논두렁 보수의 풍경은 지금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 되었지만, 농경 사회에서 계절을 맞이하던 마음과 공동체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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