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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강한 날 논두렁에서 이어지던 볏짚 말리기

📑 목차

     

     

     

    가을이 깊어가면 들판의 바람은 다른 계절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띠었다.
    햇빛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공기 속에는 겨울을 향해 흘러가는 서늘함이 스며 있었다.
    벼를 베어낸 뒤 남겨진 볏짚은 이 시기가 되면 말려 두어야 했고, 마을 사람들은 바람이 적당히 부는 날을 골라 논두렁으로 나섰다.

    바람 강한 날 논두렁에서 이어지던 볏짚 말리기

     

    볏짚을 말리는 일은 단순히 농사 뒤처리가 아니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다음 해 농사에도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볏짚은 가축의 먹이로 쓰이기도 하고, 초가집의 지붕이나 생활도구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말리는 것이 늘 중요했다.
    그래서 바람이 일정하게 불고, 습기가 적은 가을날이면 마을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논두렁으로 모였다.

     

    논두렁 위에는 수확을 마친 흔적이 고요하게 남아 있었다.
    벼를 베어낸 자리에는 짤막한 줄기들이 남아 있었고, 빛을 받은 논물은 잔잔하게 흔들렸다.
    볏짚을 한데 모아 가지런히 펼쳐 놓으면 바람이 볏짚 사이를 지나가며 소리를 만들었다.
    짧고 건조한 바람소리는 볏짚이 마르는 과정의 신호처럼 들렸다.

     

    볏짚을 말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뭉치들을 풀어헤쳐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두껍게 쌓아두면 안쪽은 마르지 않아 곰팡이가 생기기 때문에, 가능한 넓게 펼쳤다.
    볏짚 하나하나의 결은 바람을 따라 움직였고, 들판 전체가 작은 물결처럼 흔들리기도 했다.
    이 움직임은 멀리서 보면 들판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부드러웠다.

     

    볏짚 말리기는 바람과 햇빛을 읽는 일이었다.
    바람이 너무 강하면 볏짚이 흩어질 수 있었고, 바람이 약하면 충분히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며 볏짚을 뒤집거나 자리를 조금씩 옮겨 균형을 맞추었다.
    돌돌 말려 있는 부분이 있으면 손으로 가볍게 풀어준다거나, 아래쪽이 눅눅해 보이면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널어두기도 했다.

     

    볏짚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가을의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짚 특유의 은은한 향이 들판을 따라 퍼졌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그 향은 더 또렷해졌다.
    아이들은 볏짚 위를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지만, 어른들은 늘 말렸다.
    볏짚이 부러지거나 흩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볏짚이 만드는 부드러운 소리를 좋아했고, 볏짚 사이에 손을 넣어 바람이 지나는 느낌을 즐겼다.

     

    볏짚이 어느 정도 마르면 어른들은 길게 펼쳐진 볏짚을 다시 모아 새 뭉치를 만들었다.
    두 손으로 볏짚을 한데 모아 꽉 잡으면, 햇빛에 데워져 따뜻해진 짚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 온기 속에는 햇볕과 바람이 함께 스며 있었고, 그 따뜻함이 마을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볏짚을 묶을 때 사용하던 새끼줄은 손쉽게 풀렸다가 다시 매듭지어졌고, 그 매듭은 겨울 내내 튼튼하게 버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람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날이면 볏짚은 생각보다 빨리 마르기 시작했다.
    볏짚이 바삭하게 건조되면 손으로 쥐었을 때 짧은 마찰음이 났고, 그 소리가 완전히 마른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때가 되면 어른들은 볏짚을 차근차근 쌓아 올렸고, 높지 않게 층을 만들어 저장하기 좋은 모양을 갖추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들판의 빛은 빠르게 붉어졌다.
    바람은 낮보다 한결 차가워졌고 볏짚은 그 속에서도 잔잔하게 흔들렸다.
    어른들은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하며 볏짚 더미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혹시라도 마르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다음 날 햇빛 아래 다시 펴두기 위해 한쪽에 따로 모아두기도 했다.

    볏짚을 말리기 위해 들판에서 보낸 하루는 늘 조용했다.
    큰 소리도, 빠른 움직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의 흐름을 읽고, 볏짚의 상태를 눈으로 살피며, 천천히 시간을 쌓아가는 과정이 전부였다.
    이 조용한 과정 속에는 계절을 이해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방식이 스며 있었다.

     

    볏짚 말리기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지만, 한때는 가을 들판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가을의 기운, 바람의 결, 볏짚의 향이 함께 만들어낸 이 시간은 겨울을 준비하던 농촌의 느린 호흡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