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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나절 우물가 옆 평상에서 이어지던 여름 부채 만들기

📑 목차

     

     

     

    여름의 기운이 마을에 깊게 스며드는 시기면 우물가 주변은 다른 계절보다 조금 더 활기를 띠곤 했다.
    햇빛은 이미 오래전부터 땅을 데우고 있었고,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뜨거움과 서늘함이 섞인 묘한 감촉을 남겼다.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는 저녁나절, 우물 옆 평상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다.
    그날의 평상 위에서는 여름 부채를 만드는 작은 손작업이 조용히 이어졌다.

    저녁나절 우물가 옆 평상에서 이어지던 여름 부채 만들기

     

    부채를 만드는 일은 화려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과정이었다.
    평상 위에는 미리 잘라두고 말려 둔 대나무 살과 한지 조각, 얇은 천 조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나무는 여름 햇빛을 충분히 받아 바삭하게 건조되어 있었고, 손끝으로 짚어보면 섬세한 결이 일정하게 느껴졌다.
    이 재료들은 모두 부채의 뼈대를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녁 바람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물을 긷는 도르래가 가끔 울리면, 그 소리가 평상 위로 은근하게 번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손을 움직이다 보면 마치 작업의 속도가 자연스레 맞춰지는 듯했다.
    한지에 바람이 스치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 소리는 여름 저녁의 공기와 참 잘 어울렸다.

     

    부채의 뼈대를 맞추는 일은 차분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대나무 살을 반원 형태로 모아 중심을 묶고, 놓친 부분이 없는지 살피며 살을 하나씩 펼쳤다.
    펼쳐지는 대나무 살은 날씨 때문에 조금씩 휘기도 했지만, 손으로 조정하면 고르게 모양을 잡을 수 있었다.
    해가 기울며 평상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길어지면, 대나무의 선명한 결이 그 위에서 부드럽게 드러났다.

     

    한지는 부채의 표면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였다.
    한지를 자를 때는 종이의 결을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여야 했고, 너무 힘을 주면 쉽게 찢어지기도 했다.
    종이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펴고, 대나무 살 위에 맞춰 붙이면 작은 숨결처럼 종이가 자리에 붙었다.
    종이를 붙일 때 나는 아주 미세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잔잔했지만, 작업하는 사람에게는 익숙한 리듬이었다.

     

    저녁 햇빛은 점점 옅어지고 바람은 서늘해졌다.
    이 시간대의 우물가는 부채 만들기에 가장 알맞았다.
    손바닥에 살짝 닿는 바람은 땀을 식혀주었고, 건조한 대나무와 종이가 수분을 머금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중간 작업이 잘 이어지면 평상 위에는 부채 모양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부채를 꾸미는 과정에서는 집집마다의 개성이 드러났다.
    누군가는 꽃무늬 한지를 사용했고, 또 다른 사람은 색 선이나 잔 무늬가 들어간 천 조각을 붙이기도 했다.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무늬들은 완성된 부채에 고유한 분위기를 담아주었다.
    조용한 저녁나절의 공기 속에서 이런 색과 무늬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평상 아래에서는 아이들이 조용히 놀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직 손재주가 서툴러 부채 만들기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어른들이 만든 부채를 흔들며 바람을 느끼는 데는 누구보다 빠르게 익숙해졌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흔드는 부채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그 작은 바람 소리가 저녁시간의 정취를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부채가 완성되면 평상 한쪽에 걸쳐 두어 자연 바람에 말렸다.
    종이가 마르며 생기는 살짝 팽팽한 느낌은 완성도를 알려주는 작은 신호였다.
    대나무 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완성된 부채가 제 기능을 잘 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어둠이 서서히 마을을 감싸기 시작하면 부채 만들기 작업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우물가 도르래 소리도 잦아들고, 평상 위에 놓인 재료들은 다시 정갈하게 모아졌다.
    이 시간이 되면 저녁바람은 조금 더 깊어져 완성된 부채를 흔들면 은근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여름 부채 만들기는 단순한 생활 작업이 아니었다.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손을 움직이며 하루의 온도를 낮추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조용한 의식 같은 시간이었다.
    우물가 평상에서 이어진 이 여름 풍경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오래전 마을이 지녔던 따뜻하고 느긋한 리듬을 그대로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