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독대 앞에서 햇볕을 살피던 오전

📑 목차

     

     

     

    장독대 앞에서 햇볕을 살피던 오전

     

    장독대가 있는 마당 한쪽은
    아침이면 하루 중 가장 고요한 빛을 먼저 받아들이는 곳이었다.
    햇볕이 기와 아래서 천천히 내려앉을 때,
    그 빛은 장독의 표면을 부드럽게 감싸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지곤 했다.

     

    겨울을 지나 봄 기운이 조금씩 스며드는 시기에는
    장독대 둘레의 공기도 다른 계절과는 묘하게 달랐다.
    밤새 차갑게 식어 있던 항아리는
    햇살이 닿기 시작하면
    겉 표면부터 서서히 온기가 올라왔다.
    손바닥으로 항아리의 곡선을 살짝 쓸어 보면
    온도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 첫 감촉은 마당의 하루 흐름을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 같았다.

     

    장독대 앞에 서서 햇볕을 살피는 일은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이어져 온 작은 확인 과정이었다.
    햇볕이 어느 방향으로 비추는지,
    얼마나 따뜻하게 드는지,
    그 빛이 장독의 어느 부분까지 닿는지를 살피는 일은
    된장과 간장을 지키기 위해
    여러 세대 동안 이어져 온 손길의 일부였다.

     

    독 뚜껑은 밤사이 얹어 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침 공기가 차가운 날에는
    뚜껑을 들어올릴 때
    안쪽에서 살짝 만든 온기가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희미한 냄새와 함께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냄새는 된장의 깊이와 햇볕의 양,
    그리고 항아리가 견딘 시간까지
    모두 함께 담고 있는 듯했다.

     

    장독대를 둘러싼 작은 공간에는
    낙엽이 마른 채로 옆으로 밀려 있었고,
    바람이 살짝 불면
    그 낙엽들이 항아리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갔다.
    이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아침 공기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햇볕이 고르게 드는 날이면
    항아리 그림자는 짧고 선명했지만
    흐린 날에는 그림자가 금방 풀어져
    마당 전체에 부드러운 회색빛이 번져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나오는 냄새는
    항아리마다 조금씩 달랐다.
    오래 숙성된 장은 깊고 진한 향을 가지고 있었고,
    막 바람을 더 맞아야 하는 장은
    조금 더 밝은 냄새를 품고 있었다.
    뚜껑을 여는 동작은 오래전부터 몸에 익은 움직임이라
    어떤 날은 말없이 진행되었고,
    어떤 날은 냄새를 조금 더 오래 들이마시고
    장독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햇볕이 조금 더 기울기 시작하면
    장독대 주변에는 더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독 표면에 닿는 빛이 점점 넓어졌고
    그 빛의 양은 오늘 하루의 발효 흐름을
    조용히 알려주는 듯했다.
    장독대는 겉보기에는 단순한 공간이었지만
    햇볕의 세기, 바람의 방향, 공기의 차가움이
    모두 한곳에 모여 서로의 역할을 나누는 자리였다.

     

    장독 사이에 놓여 있던 나무 주걱은
    어느 계절을 겪고 있는지
    표면의 색만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여러 번의 계절을 품고 있었다.
    햇볕을 살피는 오전에는
    이 주걱을 들어 내용물을 살짝 젖혀보며
    장 속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빠지지 않았다.
    작은 변화도 놓칠 수 없었기에
    이러한 확인은 대부분의 집에서 일상이자 습관이었다.

     

    마당에 떨어진 빛의 결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달라졌다.
    볕이 강해지면 항아리 표면의 색이 밝아지고
    그 밝아지는 정도는
    오늘 햇볕이 장독에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줄지를
    예상하게 해주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빛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다른 항아리로 이동해
    하나씩 뚜껑을 확인하고
    필요한 것은 햇볕이 더 잘 드는 자리로 옮기기도 했다.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면
    장독대 전체의 흐름이 파악되었다.
    햇볕이 잘 들 곳과
    오늘은 조금 부족해 보이는 자리,
    각 항아리의 온기와 냄새,
    바람이 머무는 방향까지
    모두 아침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정리되었다.
    이 과정은 번잡하지 않았고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였다.

     

    오전 햇볕을 충분히 받은 항아리들은
    표면에서 잔열이 느껴질 만큼 따뜻해졌다.
    이 따뜻함은 발효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중요한 열이었고
    사람들은 그 온기를 손등으로 살짝 느껴보며
    오늘은 장이 잘 익을 것 같다고 조용히 말하곤 했다.
    이 순간은 마당 전체가
    햇볕을 끌어안고 숨을 고르는 듯한 차분함을 가지고 있었다.

     

    장독대 앞에서 보내는 이런 오전은
    눈에 띄는 큰 일은 없지만
    한 해의 맛을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간 가운데 하나였다.
    햇볕을 살피고, 바람을 읽고,
    항아리 하나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는
    세월을 이어온 집안의 손길과
    어른들의 감각이 조용히 녹아 있었다.

     

    그래서 이 풍경은
    시간이 지나도 잔잔하게 떠오르는 장면으로 남는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항아리,
    따뜻하게 내려앉던 햇빛,
    뚜껑을 열 때마다 퍼지던 깊은 향기,
    그리고 장독대를 한 바퀴 돌며 확인하던 그 고요한 오전의 기운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집 마당의 한 편을 오랫동안 지켜온
    담백한 일상의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