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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서 마른 곡식을 골라내던 시간

📑 목차

     

     

     

    다락방으로 오르는 좁은 계단은 언제나 약간의 먼지 냄새를 품고 있었다.
    계단 위쪽에서 스며 나오는 건조한 공기는
    집 안 어디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특히 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 되면
    다락방은 곡식을 정리하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다락 어귀에 서면 마른 곡식 자루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이라 곡식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았고,
    자루를 살짝 흔들면 서로 닿는 곡식알들이
    작고 단단한 소리를 내며 안에서 움직였다.
    그 소리는 겨울을 준비하던 집안의 오래된 리듬처럼 들렸다.

    다락방에서 마른 곡식을 골라내던 시간


    자루를 열면 건조한 곡식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흙이 빠진 쌀알의 매끈한 결,
    볏과 먼지를 털어낸 콩의 단단한 표면,
    좁쌀과 보리가 섞여 만든 잔잔한 색감까지
    다락방의 빛 아래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곡식을 비벼 털면 작은 먼지가 흩어졌지만
    그조차 이곳의 익숙한 풍경 중 하나였다.

    곡식을 고르는 일은 조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움직임은 크지 않았고 손끝의 감각으로 선별해 나가는 과정이 중심이었다.
    껍질이 남아 있는 낟알, 오래되어 색이 흐릿해진 콩,
    작은 흙덩이처럼 굳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골라내면
    곡식의 결은 조금씩 더 고르고 깨끗한 모습을 찾아갔다.
    이 단순한 반복 속에서
    시간은 뚜렷한 흐름을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흘렀다.

    다락방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은
    늘 일정한 방향을 유지했다.
    햇빛이 곡식 표면에 닿으면
    곡식마다 가진 색이 은근히 밝혀졌고
    그 빛이 넓게 퍼지기도, 한쪽에 고이기도 하면서
    다락방 특유의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빛은 조금 더 차분해졌고
    그 아래에서 고르는 곡식들은
    계절을 저장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곡식을 고르다 보면
    작은 소리들이 이어졌다.
    곡식알이 손바닥에 떨어지는 부드러운 소리,
    체 바닥을 스치는 잔소리 같은 마찰음,
    자루 안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울림까지
    이 공간의 모든 감각이 서서히 하나로 모이는 듯했다.
    이런 소리들은 시끄럽지 않았지만
    다락방에 오래 머무르다 보면
    오히려 이 소리들이 편안함을 만들어 주었다.

    잠시 쉬려고 허리를 펴면
    다락방 천장 가까이에서 머무는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바닥 쪽의 공기는 곡식의 잔열이 배어
    조금 더 따뜻했기 때문에
    그 온도 차이는 다락방만이 가진 독특한 감촉이었다.
    손에 묻은 곡식의 가루를 털며
    다시 자루를 향해 손을 뻗으면
    조용한 작업은 다시 이어졌다.

    곡식을 모두 골라 담아두면
    자루는 이전보다 가벼워졌고
    안의 곡식은 한층 더 고르고 정제된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자루를 묶는 끈을 정리하고
    다락 한 켠에 가지런히 세워두면
    그제야 하루의 작은 작업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다락방 바닥에는 곡식을 털어낸 흔적이 약하게 남았고
    그 흔적마저도 계절의 흐름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조금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깥 공기와 맞닿는 순간
    손끝과 옷깃에 남아 있던 다락방의 냄새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부드럽게 퍼졌다.
    곡식을 고르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느리게 이어지던 다락방의 감각은
    오랫동안 몸에 남는 여운을 만들었다.

    다락방에서 마른 곡식을 골라내던 시간은
    집 안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수확한 곡식을 한 번 더 살피고
    겨울을 준비하는 이 과정은
    단순함 속에서 안정과 여유를 길어 올리는 시간이었다.
    그날의 공기와 빛, 손끝의 감촉은
    다락방을 나서고 나서도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