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울타리 아래에는 계절마다 다른 색이 머물렀다.
햇빛이 비스듬히 내려앉는 시간,
그 자리에서는 작은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지고
바람이 지나가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고요한 집안의 시간을 부드럽게 흔들어 놓았다.
특히 콩잎을 널어 말리던 날이면
울타리 아래의 정취는 더욱 선명해졌다.
콩잎을 따온 뒤
한데 모아 물기를 털어내고
소쿠리에 가볍게 펼쳐두는 일부터가 시작이었다.
잎 하나하나의 결을 살피면
초록빛이 남아 있는 부분과
햇볕에 조금 더 드러난 부분이 미묘하게 달랐다.
이 작은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은
금세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울타리 아래 공간은 콩잎을 말리기에 참 알맞았다.
햇빛이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고
흙과 돌이 알맞게 펼쳐져 있어
콩잎을 놓아두면 바람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이런 조건 덕분에
과하게 눅눅해지지도 않고
너무 빠르게 바싹 말라버리지도 않았다.
콩잎을 한 장씩 펼쳐 놓다 보면
자연스레 손끝이 잎의 온도를 느끼게 되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잎은 아주 작은 움직임을 보였고
그 모습은 마치
숨을 고르며 말라가는 듯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햇빛 아래 잎의 결이 드러나는 순간
잔잔하지만 은근한 생기처럼 느껴졌다.
울타리를 따라 나무기둥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햇빛은 그 기둥에 여러 겹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그림자 사이에 놓인 콩잎들은
마치 한 폭의 조용한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햇빛이 조금씩 이동하면
그림자는 다른 방향으로 늘어났고
콩잎 위에도 새로운 결이 생겼다.
이 변화는 아주 미세하지만
하루의 흐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호였다.
정오에 가까워지면
바람의 성질이 조금 달라졌다.
아침보다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울타리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강도도 높아졌다.
그때쯤 되면
콩잎의 표면이 건조해지는 속도도 빨라졌고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면
수분이 은근히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콩잎을 뒤집을 시간이 되면
손바닥에 잔잔한 풀향이 묻었다.
잎을 아래위로 부드럽게 넘기면
표면의 결이 달라지고
거기에 햇빛이 다시 닿으며
색이 조금 더 짙어지는 듯했다.
이런 순간들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을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경험처럼 느껴졌다.
콩잎 말리기에는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
그날의 햇빛의 세기,
기온의 미묘한 차이 등을 살피는 감각은
오랜 시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울타리 아래의 그늘과 빛을 보고
지금 뒤집어야 할지,
조금 기다려야 할지를 판단하는 일은
경험과 감각이 함께 움직이는 과정이었다.
오후가 깊어지면
울타리 아래로 드리워지던 햇빛의 각도도 달라졌다.
바닥 위에 어둠이 조금씩 늘어났고
콩잎의 표면은
아침에 비해 훨씬 가벼운 느낌을 띠었다.
잎을 들어 올리면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정도를 통해
말림의 상태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햇빛이 완전히 기울기 전
잘 마른 콩잎을 모아 다시 소쿠리에 담는 순간,
울타리 아래에 퍼져 있던 콩잎의 흔적은
하루 동안의 시간을 고요히 기록한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조금 텅 빈 듯했지만
그 안에는
작은 노동이 만들어낸 여유가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서는 길에
울타리 위로 남은 빛을 바라보면
하루가 길게 늘어져 있는 듯했다.
그 자리에서 말린 콩잎은
나중에 식탁 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났고
그 맛과 향 속에는
이날의 햇빛과 바람,
그리고 울타리 아래의 조용한 시간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울타리 아래에서 콩잎을 말리던 풍경은
이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그 방식 속에는
계절의 속도를 놓치지 않던 삶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손끝으로 느끼던 잎의 온기,
그늘과 햇빛이 만들어내던 변화,
그리고 바람 한 줄기까지
하루를 깊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던 시간이었다.
'사라진 마을 축제와 전통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랑채에서 아이들 웃음이 모이던 한낮 (0) | 2025.12.11 |
|---|---|
| 장터 나갈 준비로 바구니를 손보던 저녁 (0) | 2025.12.11 |
| 봄 햇살 아래 대청마루를 정리하던 아침 (0) | 2025.12.10 |
| 마당 한쪽에서 새끼줄을 꼬아 만들던 날 (0) | 2025.12.10 |
| 부엌 아궁이 앞에 모여 앉던 겨울의 오후 (0) |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