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가을의 기운이 논둑에 천천히 내려앉으면 넓게 펼쳐진 들판은 색을 달리하며 깊어졌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 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낸 잔잔한 소리는 계절의 흐름을 알려주는 신호처럼 들렸다.
해가 낮아지기 시작하면 논둑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그 위로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논둑에 서 있는 허수아비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언제나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허수아비는 특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막대 두 개를 엇갈리게 세워 만든 간단한 모습이었다.
낡은 옷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소리가 나지 않아도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허수아비를 세우는 순간은 들판의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 놓았다.
막대를 땅에 깊게 박아 고정시키면 그 자리에서 가을의 바람을 바로 맞으며 우뚝 서 있게 된다.
옷자락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흔들릴 때면 들판 전체가 그 움직임에 따라 미세한 떨림을 남겼다.
풍경은 단순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수아비가 논둑의 한 부분처럼 자연스레 자리를 잡는 듯했다.
허수아비 주위의 논둑은 계절의 색을 가장 빨리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벼의 잎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록에서 황금빛으로 바뀌고,
바람이 들판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벼 줄기들이 한 방향으로 일렁였다.
이 움직임은 규칙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계절의 리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허수아비의 옷은 햇빛과 바람을 오래 받아 빛바랜 색을 띠고 있었다.
천의 결이 얇아진 부분에서는 빛이 통과하며 투명한 느낌을 주었고,
그 그림자가 논둑 위에 길게 드리워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는 옷자락이 크게 흔들렸고,
바람이 잦아들면 허수아비는 들판의 중심에 고요하게 서 있었다.
논둑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서는
벼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흐름이 가장 먼저 들렸다.
물결처럼 움직이는 벼의 잎은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반짝였고,
그 반짝임은 허수아비의 그림자와 함께 들판 위에서 길게 이어졌다.
빛과 그림자가 섞이는 이 풍경은 가을의 깊이를 조용하게 보여주었다.
허수아비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작은 돌과 흙이 섞인 논둑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흙은 바람을 받아 건조하게 굳어 있었고,
돌은 햇빛을 머금어 따뜻하게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땅의 질감은 허수아비가 서 있는 공간에 안정감을 더해 주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들판의 색은 점점 짙어졌다.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면 그 아래의 그림자도 함께 낮아졌고,
허수아비가 서 있는 자리 주변으로는
낮은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햇빛은 허수아비의 옷자락 위에서 점차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며 들판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들판의 공기는 조금 더 차가워졌다.
가을 바람이 논둑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허수아비의 그림자는 노을 속에서 한층 선명하게 보였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나 들판의 끝에 닿을 듯했고,
풍경 전체가 저녁의 고요함 속에서 하나의 장면처럼 이어졌다.
허수아비가 서 있는 자리는
가을의 하루를 온전히 담아내는 작은 기록 같았다.
바람의 흐름, 벼의 움직임, 빛의 변화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은 들판의 시간을 천천히 쌓아가는 듯했다.
논둑 허수아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계절을 품고 서 있는 가을의 풍경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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